조선임전보국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hirobot (토론 | 기여)
잔글 白:사:Ysjbserver요청으로 {{주석}}을 {{각주}}로 바꿈 total:18220, replaced: {{주석 → {{각주 using AWB
2번째 줄:
 
==개요==
[[최린]], [[김동환 (1901년)|김동환]]이 주도한 [[임전대책협의회]]와 [[윤치호]] 계열의 [[흥아보국단]]이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설립 목표는 황도정신의 선양과 전세체제하에서의 국민생활 쇄신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설립 취지문에 따르면, 반도민중은 특별지원병 외에 병역에 복무할 명예를 가지지 못하므로 무한한 황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국민운동의 강력한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단체를 설립한다면서 2천 4백만 조선민중에게 애국의 지정을 호소하고 있다. 단체의 강령으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내걸었다.
14번째 줄:
 
== 친일 활동 예시 ==
광복후 부통령까지 하였던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이 [[조선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 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 [[친일파]]로 변절됐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어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랐다.<ref>[http://dna.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7%80%EC%9B%90%EB%B3%91%22%2C%22startIndex%22%3A0%2C%22page%22%3A1%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Date%22%3A%221938-01-01%22%2C%22endDate%22%3A%221938-12-31%22%7D 지원병 보도내용] 동아일보 기사 참조</ref> 5월부터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97# ‘고려대학’은 2010년판 신명심보감? ]</ref>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ref>《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4-3권. p43~p97</ref>
 
{{인용문|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 가 반도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促)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회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성하라."}}
 
{{인용문|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며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매일신보 1943년 11월 6일자 "대의에 죽을 때, 황민의 책무는 크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28번째 줄:
정구충(1895~1986)은 1921년 오사카의대를 졸업했고 1932년 같은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는 안동과 해주 등의 도립의원에서 외과과장으로 근무했고, 1937년부터는 경성여자의전의 외과 교수로 일했다.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평의원,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1939년 배영(排英)동지회 평의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 등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했다. "학병이여 잘 싸워라"(<매일신보> 1943년 11월 26일자), "출진하는 청년학도에게 고함―역사적 조류를 타라"(<춘추> 1943년 12월호) 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5월까지 경성여자의전/수도여자의대 교장/학장을 지냈으며, 1947년 대한외과학회 회장, 1959년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최동(1896~1973)은 1921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26년부터 캐나다 토론토대학 병리학교실에서 상피암종을 연구한 뒤 의이학사(醫理學士) 학위를 받고 1928년 귀국했다. 1930년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5년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9년 2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 취임했다. 1936년 3회에 걸쳐 <재만조선인통신>에 "조선 문제를 통해 본 만몽 문제"를 기고했는데, 3회분에서 재만조선인통신사는 최동이 "조선 민족과 야마토 민족과의 동종동근의 역사적 실증을 들어 참된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결합을 당당하게 주장했다"라고 소개했다. 최동은 그 글의 말미에서 "대민족주의의 구심적 국책을 확립해서 그 궤도 내에서 조선 민족의 원심적인 해방·발전에 경제적 원조를 부여하는 일이 제국의 기초를 더욱 공고히 하고, 동아의 평화를 지키며 세계의 안녕질서를 확보하는 근본이라는 사실을 총명한 위정자는 깨닫고, 현명한 국민은 인지하기를 희망한다"라고 했다. 1938년 기독교계의 친일 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앵글로색슨인이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발표했다. 해방 후 다시 세브란스의전 교장을 지냈고, 의과대학으로 승격한 뒤에는 학장직을 맡았다. <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07233423 친일파 의사들의 생존법,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프레시안(2010.03.08) 기사 참조</ref>
 
== 관련 인물 ==
76번째 줄:
 
==주석==
{{주석각주}}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