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를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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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얼러''' 또는 '''코를라''' ({{llang|ug|كورلا شەھىرى|코를라 시}}, {{llang|mn|Хорл}}, {{zh|s=库尔勒市|t=庫爾勒市|p=Kù'ěrlè Shì}})는 [[중화인민공화국]]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위치한 중소 도시이다. 쿠얼러는 [[바잉궈렁 몽골 자치주]]의 주도로, 면적은 [[프랑스]]보다 크며 [[중국]]에서 가장 큰 주이다. 옛날부터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로 번창했었지만, 최근에는 타림 유전이 개발되면서 유전개발의 기지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이에 따라 [[한족]]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대다수를 차지하던 [[위구르족]]은 거주지를 잃고 한족이 70%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 이름은 때때로 영어로 쿠를라(Kurla)로 표기하기도 한다.
 
== 지리 ==
쿠얼러는 [[우루무치]]에서 남서쪽으로 200km200 km 떨어져 있다. 그러나 도로 여행으로는 500km500 km 이상이다. 얀키([[카라샤르]])로 가는 톄먼관([[철문관]])은 도시의 북쪽 7km7 km 지점에 있다. 그곳은 방어하기 쉽기 때문에 고대 [[비단길]]을 북쪽의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콩큐강은 쿠얼러의 중심을 통해 흐르며 그것은 신장에서는 독특한 특색이다. 공작강으로 자주 오역되는 중국의 콩큐라는 단어는 실제로 [[위구르어]] 콩키에서 나왔고 물이 많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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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Image:Tarimbecken 3. Jahrhundert.png|thumb|250px|right|타클라마칸 사막]]
고대 서역 36국의 하나인 [[거리국]](渠犁國)이었으며, [[한나라]] 때는 위리(尉犁)로 알려졌으며 [[서역도호부]]에 복속되었다. [[한서]](BC125-AD23))에는 1,200호에 9,600명 정도가 있었고 2,000명 정도가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선선]](鄯善)과 차말현(且末县)에 인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61년에 흉노족이 코를라, [[카라샤르]], [[쿠차]] 등 15개의 왕국에서 3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호탄]]을 침공하였다. 91년에는 한나라 장군 [[반초]]가 카라샤르 왕국과 호수드, 쿠얼러, 샨구오 등의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림:Korla oldandnew.jpg|thumb|250px|코를라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106년-125년 사이에 일어난 서역의 반란으로, 위리(쿠얼러)와 카라샤드의 국왕이 항복을 거부하자, 반초의 아들인 반양이 둔황의 도호를 따라서 이들을 격퇴시켰다. 3세기에 들어 위리로 기록된 코를라와 호수드 그리고 샨왕(산구오)는 모두 카라샤르에 복속되었다.
 
북위 시대에는 유려성(柳驢城)으로 불리다가 그 후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48년]] [[당나라]]에 점령되어 언기도독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 티베트 왕조의 침입을 받아 점령되면서, [[840년]] [[위구르족|위구르]]가 서쪽으로 옮겨와 이 땅에 정착했다. 또한 [[서요]], [[차가타이 칸국]], [[중가르 칸국|중가르]] 등에 점령되기도 하였고, 1785년 청나라에 의해 신강이 되었다.
 
1877년 프란시스 영허즈번드는 베이징에서 인도로 여행하는 도중 이곳 쿠얼러를 거쳐서 지나갔다. 그의 기록에는 이곳에 번영하였으며,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고, 그가 지나친 다른 어떤 곳보다 훨씬 빼어난 문화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9년]] 쿠얼러 현으로 편입되었고, 1960년 바인궈렁 몽골 자치주 정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1979년 쿠얼러 시로 승격이 되어 1984년 쿠얼러 시와 현이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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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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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