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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ukuyama-Cho in Mokuho.JPG|thumb|일제강점기때의 목포부]]
{{목포의 역사}}
'''목포부'''(木浦府)는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1949년]]까지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이십삼부|23부제]]의 [[나주부]]의 [[무안군]] 지역이였으며, [[1896년]]부터는 조선 고종 33년 (1896년)에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무안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897년 목포가 개항하면서 1906년 '''무안부'''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1910년]] [[9월 30일]] 공포, [[10월 1일]] 시행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따라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었다. 현재 [[구 목포 일본영사관]]의 건물이 부청사로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 [[1914년]] [[4월 1일]] [[목포부]]가목포부가 분해되어, 도시 지역인 부내면만 '''목포부'''로 남고, 부내면을 제외한 목포부의 나머지 면과 지도군 전역, 완도군 팔금면, 진도군 도초면이 [[무안군]]으로 개편되었다.<ref>조선총독부령 제111호 (1913년 12월 29일)</ref> [[1949년]] 목포부가 [[목포시]]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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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목포]]간 철로가 개설되었다. 이미 목포항의 기능을 곡물 수탈로 설정한 일제는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설치했고 이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철도, 조선, 수산가공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인들은 각지에서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았다.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깝게 자리를 잡기 위해 작은 움막 따위를 지어 좁디 좁은 골목을 만들어 지냈다고 한다. 그 자리는 옛 공동묘지로서 조선총독부가 허가하면서 겨우 거주가 허락된 곳이었다.<ref>고석규,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ref> 각종 시설이 들어서는 한편 [[목포극장]]이 생겨났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에서 내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은 서울의 [[단성사]]와 [[광주광역시|광주]]의 광주극장, 목포극장 세 곳뿐이었다.<ref>이경재, 가람기획 《한양이야기》 264쪽</ref> 그리하여 [[1926년]]에는 인구가 33,244명으로 급증하여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 중에 일본인이 1/4 가량 되었다. <ref>목포부사(木浦府史)</ref>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 지역 편입으로 면적이 늘어나는 한편 인구 6만의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항에 모이던 물품은 '''一黑'''([[김 (해조류)|김]]) ,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ref name= '목포연혁'> 목포역사문화관광 홈페이지 중 연혁 참조</ref> 일본인들은 전북에 쌀의 군산이 있다면 전남에는 면의 목포가 있다고 했는데, 1930년대 초 목면공장의 수가 20여 곳에 이르렀던 조선 제일의 목면 수출항이었다. 이 목면은 일본 간사이의 한신 지역으로 주로 팔려나갔다.
 
== 주석 ==
{{주석각주|2}}
 
[[분류:목포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