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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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544년]] [[사량진]]에서 난동을 부리던 왜구들은 이후 [[조선]]에서 문호를 닫자, [[대마도]]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항포를 열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에서는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 (포구)|염포]])를 열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뜨렸으며, [[제주도]]와 다도해, [[전라남도]] 해안가를 침략했다. 급기야 [[1555년]](명종 10년)에 [[전라남도]] 연안에 있는 달량포(達粱浦)<ref>전라남도 해남군 북평</ref> 에 왜선 60여 척이 쳐들어왔다. 곧 근무중이던 변장들이 왜구들의 기습공격에 살해되고 순식간에 10개 진이 함락되었다.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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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5월 13일]] 왜구들은 먼저 [[영암]], 달량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ref>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ref>, [[장흥]], [[강진군|강진]], [[진도]] 등을 짓밟으며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은 사로잡히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ma_11005018_001&grp=&aid=&sid=0&pos=0 전라도 관찰사가 왜적이 달량을 포위하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치계하다], 명종실록 18권, 1555년, 5월 18일</ref>
 
가리포 수군첨사(加里浦水軍僉使) 이세린(李世麟)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원적]](元積)은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영암 달량포로 출전했으나 오히려 왜구에게 포위되어 [[원적]]과 [[한온]]은 항복했다가 피살되고 [[이덕견]]은 항복하는 척 하다 탈출했다. [[전라도]][[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사가 붕괴하자 침입한 왜구의 횡행을 막을 수 없었다. 정부는 급히 [[이광식]]을 후임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해 병력을 주어 내려보냈다.
 
== 진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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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후원군이 도착하자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이 군사를 이끌고 영암으로 가서 [[남치훈]]군사와 합세하여 [[5월 25일]] 영암 해변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녹도(鹿島)를 습격한 데 이어 [[6월 27일]] 제주도를 습격했으나, 상륙한 왜구를 목사 [[김수문]](金秀文)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다.
 
그해 10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는 이들 [[전라남도]] 해안가를 습격한 왜구의 목을 잘라 보내어 죄를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호소해 왔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기관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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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
 
{{한국과 일본의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