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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긍익'''(李肯翊, [[1736년]] ~ [[1806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 또는 연려실(燃藜室)이며, [[한성부]] 출생이다. [[이광사]]의 아들이다.<ref> [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67_1_0001427&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ref>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조선 정종|정종]]의 서자 [[덕천군 (왕족)|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9261752595&code=900305 조선 최후의 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사상 上] 《경향신문》, 2008년 9월 26일, 박석무</ref>.
 
어려서 아버지 이광사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고증]]학자로서도 유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소론]]에 속하였는데, [[노론]]의 집권으로 여러 번 귀양살이를 했으며 온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다. 많은 책을 저술했으나 여러 번 귀양살이를 하느라 대부분 유실되고, 조선 왕조 야사(野史)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만 전한다.
 
== 저작 ==
이긍익의 역사에 대한 안목을 살펴 볼 수 있는 저작으로 《[[연려실기술]]》을 꼽을 수 있다. 이긍익은 고증을 역사에서 제일의 생명으로 여기고 어디까지나 '술이부작(述而不作)'과 '불편부당(不便不黨)'의 정신으로 남인 · 북인 · 노론 · 소론 및 유명 · 무명 인사를 가리지 않고 자료들을 섭렵, 인용하였으며, 거의 국내자료에 국한하였다. 이것은 [[한치윤]](韓致奫, 1765 ~ 1814)이 《[[해동역사]]》를 쓸 때 외국자료를 통하여 한국사를 이해하려 한 것과 대조된다. 역사는 내 나라의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자아의식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술에서 생명으로 다룬 것은 객관성 · 공정성 · 체계성 · 계기성 · 현실성이었는데 당시 상황에서 앞선 역사의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 가계 ==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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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저, 한국사전연구사(1998년)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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