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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자크 당통''' (Georges Jacques Danton, [[1759년]] [[10월 26일]] ~ [[1794년]] [[4월 5일]]) 은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이다. 샹파뉴에서 출생한 그는 [[로베스피에르]], [[장폴 마라|마라]]와 함께 '프랑스 대혁명의 3거두'라고 불린다.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웅변가로서도 알려졌으며, 특히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이다'''라고 한 연설은 유명하다.
 
[[1790년]] [[자코뱅당]]에 가입하여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고 왕당파를 처형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와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잦았고 결국 [[1794년]]에 전세가 호전되기 시작하자 3월부터 시작된 혁명 세력내의 좌, 우파에 대한 탄압중에 "외국인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반혁명 세력을 도와 준 혐의"로 혁명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 생애 ==
[[1759년]], [[프랑스 왕국]]의 [[샴페인]] [[아루시 쉬르 오브]]에서 태어났다. [[1780년]]에 [[파리]]로 나와 법을 배우고 변호사가 되어, 결혼하여 1787년 왕실 고문회의의 변호사가 된다. 몬테스큐와 디드로의 저서를 애독했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이에 공감하고 참여하여, [[자코뱅 클럽]]에 가입한다. 독특한 존재감을 발휘하여 9월 코르들리에 지구 의장에 뽑혔다. [[1790년]] 4월 [[코르들리에 클럽]]을 창설 후 샹 드 마르스의 소동에 휘말려 잠시 영국으로 망명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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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민 공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왕 재판에서 처형에 찬성하였다. 혁명 재판소 및 공안위원회의 설립에도 기여하고 산악 파(몽테뉴파)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지롱드 파]]와도 접촉하여 당파 싸움을 멈추려고 하였지만, [[당통]] 자신의 비리 의혹과 친구인 장군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가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자 궁지에 빠져 총리를 사임했다.
 
지롱드 파 추방 후 [[1793년]] 이후는 당통파(관용파)를 결성하여 공포 정치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의 석방을 호소하였으나, [[1794년]] 1월 인도 회사 해산에 따른 청산의 횡령이 발각(인도 회사 사건)되어, 당통파에 속하는 의원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1794년]] 3월, [[자크 르네 에베르]]가 이끄는 에베르 파의 체포와 처형은 [[로베스피에르]]와 협력했지만, [[1794년]] 4 월 로베스피에르는 뇌물수수 혐의로 당통과 [[카미유 데물랭]] 등의 당통파를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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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주석각주}}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