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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피화'''(戊辰被禍)는 정월지주(正月之誅)라고 일컬어지는 [[임견미]], [[염흥방]] 일족의 숙청, 형벌로 조반에 대한 무고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염흥방]]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최영]](崔瑩)과 사전 협의를 한 [[우왕]]의 명으로 조반은 석방되고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과 [[염흥방]] 일당이 무진년(戊辰年)에 화를 당했다고 해서 ‘'''무진피화'''’, 혹은 정월(正月)에 처벌했다 하여 ‘'''정월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ref name="무진피화">《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반(趙胖),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사건의 발단 ==
조반이 이광에게 찾아가 애처롭게 청하여도 이광이 더욱 방자하고 포학하자, 조반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수십 기(騎)로 그가 사는 집을 포위하고 이광을 목벤 다음에, 그의 집을 불지르고 말을 달려 [[개성특급시|개경]]에 들어가 장차 염흥방에게 알리려 하였다.
 
[[1388년]]([[고려 우왕|우왕]] 14년,무진년) 정월 초하루 염흥방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우왕에게 강권하여 [[조반 (1341년)|조반]]을 수배하였다. 체포된 [[조반 (1341년)|조반]]은 순군옥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6, 7 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고 백성들을 해치며 학대하니 이들이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해치는 도적을 제거하려 한 것뿐인데, 어찌 반란을 꾀한다고 하느냐.” 라고 항변하였지만 [[염흥방]]은 고문을 통해 기어코 반역 사건으로 몰려 했다. 그리하여 염흥방은 오히려 [[조반 (1341년)|조반]]이 난을 일으키려한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ref name="무진피화"/>
 
== 경과 ==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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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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