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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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충청북도]] [[청원군]](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출신이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1924년 데이코쿠미전(帝國美展)에 작품 〈나상(裸像)〉을 출품, 입선하였다. 동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모교인 배재중학 교원이 되었다. 한편 ‘토월미술연구회(土月美術硏究會)’, 청년학관(靑年學館, Y.M.C.A.) 미술과, 경성(京城)여자상업학교의 미술강사 등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에 작품 〈3년 전〉을 출품, 3등상을 수상한 것을 필두로 제5회 및 제16회 선전에서는 특선, 제15회 선전에 입선되었다. 1930년 [[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지내는 한편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을 창립했고 1936년 [[법주사]] 대불(大佛)을 착공하여 미완성인 채 [[서울]]에서 사망했다.<ref name="글로벌_1">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조각/김복진,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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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
김복진은 한국에 서양 조각을 처음 도입하고 [[사실주의]] 조각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작품 경향은 사실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다산 선생상〉, 〈소년〉, 〈백화〉가 있으나,<ref name="글로벌_1"/> 혼란기를 거치며 두 점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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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200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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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글로벌}}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 발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