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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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1038년]]<ref>보원 원년(寶元元年)</ref>에 [[진사 (칭호)|진사]](進士)가 된다. 부친도, 조부도 진사였다.
 
=== 신법당과의 갈등 ===
{{참고|신법당|구법당|왕안석}}
[[1067년]]<ref>치평(治平) 4년</ref> [[북송 신종|신종]](神宗)이 즉위하고 [[왕안석]]을 기용하여 신법을 단행했다. 당시 한림학사(翰林学士)였던 사마광은 당초 개혁에는 찬성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이 관료의 기득권을 침범하고 정치의 일신을 도모하자, 곧 반대 입장으로 바꾸고 추밀원을 근거지로 한 [[왕안석]] 반대파(이른바 구법파)와 연계하여 강행하는 신법 반대를 주장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신법의 철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정에서 퇴출되어 부도(副都) [[낙양]](洛陽)에에서 사실상의 은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 이후 사마광은 구법파 동조자와 함께 신법의 반대를 끝까지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조정의 의향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사마광이었지만 선대 [[북송 영종|영종]](英宗) 이후 신종에게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특히 <자치통감>의 편찬을 생각한 후에는 영종에게서 특별히 편의를 제공받으면서 그 완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 신종의 신법에 반대하여 수도에서 쫓겨난 사마광이었지만 역으로 신종에게서 <자치통감>을 완성하라는 명을 받았다. 즉 이 책은 사마광의 낙양 은거때 완성되었다.
 
=== 재집권 ===
[[1085년]]<ref>원풍(元豊) 8년</ref> 신종이 붕어하고 [[북송 철종|철종]](哲宗)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섭정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의 명령으로 [[재상]]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이때 사마광은 신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모두 신법실시이전의 법으로 되돌려 정권을 운영했으나, 매우 극단적이기에 같은 신법의 폐지를 주장하던 친구, 부하들에게도 반대받을 정도였다. 더해서 사마광의 명성은 천하에 울려퍼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 많은 관료가 사마광의 발언에 영합해 거꾸로 신법 여러 정책 중에 근간 중 하나였던 역법(役法)을 변경할 정도였기에 그 폐해는 이후 10년 가까이 영향을 끼쳤다. 바라던 신법 폐지에 전력을 기울이던 사마광이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 평가와 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