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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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광복 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간사로 일하다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5월 26일]] [[부산 정치 파동]] 때,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1953년]] 국회국방위원회위원장이 되었으며 [[1954년]] 다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6년]]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하였으며 자유당 총무부장·중앙집행위원회간사장·중앙상임위원회의장을 거쳤다. [[1958년]] 대한축구연맹회장을 맡았고, [[1959년]]에는 서울시장이 되었다. 그의 재직 기간 동안 청계천 암거공사와 용산구∼성동구∼동대문구∼성북구 ∼의정부간 순환도로 건설을 추진하고, [[1960년]] 아시아 축구대회에 대비하여 효창운동장에 축구장을 개설하였으며, 4개 보건소 청사 신축 및 공중변소 공동우물, 공중목욕탕을 증설하였다. <ref> {{웹 인용 |url= http://www.seoul.go.kr/seoul/mayor.html |제목= 역대 서울시장 |확인일자= 2008-03-21 |출판사= 서울특별시 }} </ref> 기타, 성동구동회 연합회장도 맡았다. [[4·19 혁명]] 이후 정계에서 떠났다.
1960년 4·19혁명이 성공하자 김종원은 법정에 불려나왔고 그는 "장면박사 저격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즉 사건 40일 전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임흥순에게, 임은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는 김종원에게, 김은 장역복에게, 장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박은 오충환 시경사찰과장에게, 오는 이덕신에게 범행을 차례로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