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16세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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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명종 22년) 무과에 급제해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었다. 그 뒤 북방의 외직을 전전하며 북방에서 변경을 수비하다가 왕은 너무 오래 고생이 많다 하여 내직으로 불러들여 도총부도사, 경력 등을 지냈다. 그 뒤 [[낙안군|낙안]] 군수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과 [[안골포 해전|안골포]] 등지에서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교룡산성]]에서 [[고니시 유키나카유키나가]] 군을 맞았으며, [[남원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올라온 [[이복남]]의 5천 군사와 합류하여 [[남원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후에 [[선무공신|선무]][[원종공신]] 1등에 추록되고 [[증직|증]] [[형조판서]]에도 [[추증]]되었다. 남원의 칠충신사에 제향되었는데 [[1612년]](광해군 4년) 충렬사(忠烈祠)의 사액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