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Leia0207 (토론 | 기여)
반달복구
1번째 줄:
{{정리 필요}}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는 항일의병은 을미, 을사,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으며 [[1910년]] [[8월 29일]] 국치일 이후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 을미의병 ==
{{본문|을미의병}}
1895년의 [[동학농민운동]]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1895년]] 처음으로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을미의병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 당한 것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충북 [[제천시|제천]]에서 발생하였다. 이 때의 의병들을 거느린 의병장은 [[유인석]]과 [[이소응 (유생)|이소응]]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일반 농민들까지 그 구성이 다양하였다. 지방의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친일 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제에게 탄압되었다.
 
== 을사의병 ==
{{본문|을사의병}}
이후 1905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주축이 되어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인 신돌석과 머슴출신인 안규홍 등 다양한 신분의 의병장이 나왔다는데 의의가 있으며, 을사조약의 파기와 친일 정부 관료들의 축출을 주장하였다. 을미의병에 비해 더욱 거센 의병이었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해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 정미의병==
<!--{{본문|정미의병}}-->
1907년 마지막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정미의병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해산령]]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파급력이 거대했다.
또한 이인영은 13도의 의병을 통합해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고 각 대사관에 국제 교전 단체로 인정해줄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은 이인영의 부친상 때문에 실패하였고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활동은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