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286 바이트 추가됨 ,  5년 전
가톨릭과 불화와 유언 추가
잔글 (HotCat을 사용해서 분류:이신론자을(를) 추가함)
(가톨릭과 불화와 유언 추가)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에 접어들어야 했다. 이 망명은 결실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이는 잡다한 일에서 해방되어 창작에 전념한 때문이다. 시집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fr:La_Légende_des_siècles|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 등 위고에 있어서 걸작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국민적 시인으로서 영예에 싸인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은 《두려운 해(L'Année terrible, 1872)》, 《세기의 전설》제2집, 제3집 (La Légende des siècles, 1877, 1883)》, 소설 《93년(Quatrevingt-treize, 1874)》 등이 있다.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또한 유작도 수없이 간행되었다.
 
== 가톨릭과 불화와 유언 ==
위고는 그의 대표작인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개인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프롤로 주교를 그린 바 있다. 가톨릭 교회는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등의 걸작들을 금서로 지정해 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다.<ref> 베르너 풀트 《금서의 역사》(시공사)</ref>
 
가톨릭과 화해하지 못한 위고는 교회의 기도마저 거부했다. 1881년 8월 31일 이런 유언장을 썼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그는 1885년 5월22일 눈을 감았고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ref>앙드레 모루아《빅토르 위고》(우석)</ref>
 
== 작품 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