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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ppsala universitetshuset.jpg|섬네일|왼쪽|웁살라 대학교 본관]]
1728년 8월, 린네는 그가 [[약학]]과 식물학을 모두 공부하는 것을 제안했던 요한 로스만의 조언에 따라 웁살라 대학교에 진학했다. 웁살라 대학의 식물학, 동물학, [[약리학]]과 [[해부학]] 강의는 그리 좋은 수준이 아니었지만, 린네는 그곳에서 올로프 셀시우스라는 새로운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올로프 셀시우스는 신학 교수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였다. 그는 린네를 그의 집에 받아들여주었고, 덕분에 린네는 당시 스웨덴에서 제일가는 식물학 도서관이었던 올로프 셀시우스의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729년에 칼 린네는 ''Praeludia Sponsaliorum Plantarum''이라는 식물의 성(性)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교수 루드베크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2학년 밖에 안 된 칼 린네에게 대학의 강의를 맡겼다. 칼 린네의 강의는 인기가 있어 30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곤 했다. 같은 해 6월에 린네는 루드베크의 24명의 아이들 중 3명의 교사를 맡기 위해 올로프 셀시우스의 집에서 루드베크의 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올로프 셀시우스와 린네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고, 서로의 식물학적 탐구를 계속해서 지지했다. 그 해 겨울, 투르네포르의 분류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한 린네는, 자신의 새로운 분류 체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의그는 수술과 암술의 숫자를 기준으로 식물들을 분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꽃의 해부학을 담은 ''Adonis Uplandicus''라면서라는 식물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1731년 3월, 루드베크의 전 조수인 닐스 로젠이 약학 학위를 가지고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해부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린네의 식물학 강의를 빼앗으려 했지만, 루드베크가 이를 막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린네는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그의 부모님과 만났다. 린네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지만, 그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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