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리 (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75.197.32.143(토론)의 13719387판 편집을 되돌림(유머 요소)
잔글 121.149.101.135(토론)의 편집을 175.197.32.143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37번째 줄:
이때 리 군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워싱턴군에 합류하라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리는 천천히 행군했다. [[12월 12일]] 밤, 날이 저물자 리와 12명의 위병은 뉴저지의 배스킹 릿지에 있는 ‘화이트 술집’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본대까지 3마일(5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20여명의 영국군 기마 정찰대가 실내복 차림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리를 발견하여 즉시 체포했다. 이 정찰대 중에는 바나스타 탈턴이 있었다. 리는 대륙군에 사로 잡혀 있던 리처드 프레스콧 장군과의 교환되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리가 최악의 악명을 얻은 것은 1778년 6월 몬머스 전투 때였다. 워싱턴은 적절하게 철수하는 영국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으나, 리는 반대로 후퇴를 명령했다. 리는 전진하고 있던 워싱턴의 부대에 직접 진입했기 때문에 워싱턴은 부하 앞에서 리를 몹시 꾸짖었다. 리는 ‘욕설’에 [[발끈해]] 체포되어 전투 후에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리는 유죄를 언도받고, 1년 동안 지휘관의 임무에서 제외됐다.
 
리가 전략적으로 판단을 잘못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리 자신은 적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후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헨리 클린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총 1만 명이며, 그의 부대는 절반 밖에 되지 않는 5,440명이었다. 그러나 리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부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사령관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했다. 게다가, 워싱턴은 리의 부대의 능력을 시험해 보길 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스튜벤 남작에게서 유럽식 전략을 훈련받은 최고의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리는 군법 회의의 판단을 뒤집는 의견을 대륙회의에 제시했지만, 이것이 실패하면서 워싱턴의 인격을 공격하는 수단에 호소했다. 리의 인망은 추락했다. 워싱턴의 부관 존 로렌스 대령이 적절하게 결투를 신청했다. 리는 이때 옆구리를 맞아 부상을 당했다. 리는 [[1780년]] [[1월 10일]]에 해직되어 필라델피아에서 은퇴했고 [[1782년]] [[10월 2일]]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