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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가신리 홍골에서 태어났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으로, 홍이상의 차남 황해감사 독정재(獨靜齋) 홍립(洪雨+立)의 11대손이다. 그의 7대조인 홍문관 교리 천일재 [[홍중현]](天一齋 洪重鉉)이 [[충주군]] [[노은면]] [[홍골]]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 [[숙종]] 때의 당쟁에 염증을 느껴 조선 팔도를 유람하던 홍중현은 충주군의 노은면에 터를 잡아 정착하게 된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그는 선친과 친분이 있던 감곡면 오갑의 평창 신씨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훗날 그 신씨 문중으로 혼인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 [[민응식]]의 집에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다시 [[충주]]로 피신왔다. 이때 가신리 근처에 은신하게 되었다. 홍승대의 학문과 인물됨을 본 명성황후는 "선생같은 인물이 어찌 벼슬도 하지 않고 이런 시골에서 지내느냐?"고 묻자 그는 "난세의 벼슬은 욕이옵나이다." 하였고,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나 국모의 거처를 민가로 할 수 없다는 중론에 따라 임시 행궁을 짓게 되자 g임시 궁궐의 건립을 도우라는 명을 받들어 충주 주변의 중원군, 음성군, 괴산군, 진천군 일대를
=== 구한말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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