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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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윤이 이초 사건}}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폐가입진이라는 명분을 구실로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으며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나 이에 대해 조선의 양식있는
{{출처|신료들과 선비들은 이를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았고 현대 학계에서도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 [[이성계]], [[조준]] 등과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그는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뒤봉군된 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경연지사(經延知事)에 올랐다. 그 해 [[1390년]]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명나라]] [[주원장]]에게 밀고하는 [[윤이 이초 사건]]이 발생하자,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곧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 역성혁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