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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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외교의 강화(1960년대)====
[[ 1616군사정변 혁명]] 직후인 1961년 5월 17일 오전 11시40분(한국 시각), 매그루더는 미 합참에 보낸 전문에서 쿠데타의 목적은 장면 정부의 전복뿐이며 반미-친공의 증거는 없고 오히려 공산주의 제거 프로그램이 가동하고 있다고 보고했다.<ref>이완범, 〈장면과 정권교체: 미국의 대안 고려와 그 포기 과정을 중심으로, 1952~1961〉한국민족운동사학회편,《장면과 제2공화국》(국학자료원, 2003) 60쪽.</ref> 후에 성립한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정부는 전진적인 적극 외교를 표방, 국제관계의 다원화에 대처하여 종전까지의 대미의존 관계에서 대미협력을 통한 자주적인 외교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미의존도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으나 안보 및 자립경제의 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한·미 유대의 강화가 불가결하기 때문에 대미외교에 계속 큰 비중을 두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60년대의 대미관계는 5차에 걸친 한 · 미정상회담이 대종(大宗)을 이루었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한·미 유대강화와 정상외교|한·미 유대강화와 정상외교]]〉</ref>
[[File:Park Chung-hee JKF November 1961.jpg|thumb|1961년 11월 14일, 미국 백악관에서 회담하는 한국의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좌)와 케네디 미국대통령(우). 한상국 중령(중앙 좌)과 폴 크레인(중앙 우) 박사가 통역을 하고 있다. 뒤에는 박의장을 수행한 한국의 각료들이 앉아있다.]]
혁명정부의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은 [[케네디]] 미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11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회담을 개최하였다. 한국의 경제개발계획, 군사력 증강의 유지문제 등이 협의 대상이 되었다. 회담 후인 11월 14일에는 장기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및 협력 계속, 무력공격 재개시 군사력 사용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원조의 즉각제공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후 미국은 1962년 3월 해리먼 미국 극동문제 담당 국무차관보의 방한(訪韓), 1962년 10월의 [[김종필]]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의 방미 등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이를 거듭 확인하였으며, 1962년 9월부터는 행정협정의 체결을 위한 실무교섭에 착수하였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박·케네디 정상회담|박·케네디 정상회담]]〉</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