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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과정==
처음에 [[남이(南怡)]]는 도주하려 하였으나, 금방 잡히고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국문은 예종이 직접 지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오늘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얘기하라."라는 예종의 말에 남이는 "이지정의 집에서 바둑을 두다가 북방 인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민서의 집에서도 북방에 대한 얘기를 나눴으며, 유자광에 집에서는 《강목》을 꺼내 혜성 출현에 관한 부분을 봤다."라고 이야기하였다. 한 차례 고문이 가해지고, 유자광과 대질하였을 때도 남이는 역모 혐의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고, "유자광이 불평을 가져 무고한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이 후 다른 이들에게서 특별한 진술이 나오지 않다가 국문이 있은 지 이틀 뒤 문효량이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가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내가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이를 물리치려 한다.'라고 하였기에 '이러한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물음에 '강순이 나에게 난을 평정하는 일을 맡게 했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에 [[강순]]도 같이 국문을 당하였으나, 강순의 무고에 대한 호소를 받아들여 예종은 강순을 풀어주었다.<ref>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예종, 성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 27~31p</ref>
 
===남이의남이(南怡)의 자백===
국문을 당한 지 사흘 만에 남이는남이(南怡)는 "묶은 몸을 풀어주시고 술이나 한잔 주시면, 다 고하겠다."라고 말하기에,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남이는 자신의 [[역모]]를 시인하였다. 시인하는 과정에서 남이는남이(南怡)는 "강순과 더불어 [[영순군]] 이부나 보성군, 춘양군 중 한 명을 임금으로 삼으로 했다."라고 하였고, 이를 완강히 부인하던 [[강순]]은 곤장을 맞고서는 역모를 시인하였지만, "신은 어려서부터 매를 맞은 적이 없어 매를 견딜 수 없었다."라고 하였고, 남이에게남이(南怡)에게 이를 따지자 남이는남이(南怡)는 "당신은 이미 정승에 이르렀고 나이도 들었기에 후회가 없겠지만, 나는 젊은 나이니 진실로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야사에서 남이가남이(南怡)가 강순을 끌어들인 것은 이시애의 난을 집압하는 과정을 함께 했던 [[영의정]] 강순이 자신을 위한 변론 한마디를 하지 않은 것이 괘씸하여 끌어들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강순은 [[오위도총관]]이었고, 영의정은 [[구성군 (조선)|구성군]] 이준이었다. <ref>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예종, 성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 31~32p</ref>
 
예종이 역모 계획을 물으니, 남이는남이(南怡)는 "창덕궁과 수강궁은 외부에서 알기 쉬운 까닭에 산릉제례를 나갈 때 두 궁에 불을 질러 경복궁으로 유인한 뒤 거사하려고 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옥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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