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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군은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이었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공격군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조선 수군(특히 이순신)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이런 불리한 면을 보완하였다. 일본군이 사기가 높았다면, [[옥포 해전]] 당시 [[도도 다카토라]]나 [[한산도 대첩]] 당시 [[와키사카 야스하루]], [[명량 해전]] 당시 [[구루시마 미치후사]], [[노량 해전]]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이미 앞서 소규모 해전에서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맞닥드리자 배를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단병접전", 즉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 많이 지쳤고, 병력 수도 육전을 하기에는 너무 열세였다(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병력 수로 싸운 것이 아니라 판옥선과 화포로 지금까지 싸웠다. 병력의 적음을 화력으로 보충했던 것이다). 또 육상전에 핵심 타격력인 기병을 조선 수군은 갖지 못한데 반면, 일본군은 경험이 풍부한 기병을 보유한 것도 이유였다. 대신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왜군 3,800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아끼던 부하였던 [[정운]]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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