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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 따르면,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은 후 2대 [[위 강백]]부터 7대 위후인 [[위 정백]]까지 '백'으로 일컫다가 위 경후 때에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를 칭했다. 이에 대해,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강고》에 강숙을 “맹후”라 부른 구절을 들어, 강숙은 후작이었고 또 제후의 맏이(맹)로서 '방백'이었기 때문에 이후 강숙의 후예들이 '백'을 칭한 것은 '방백'의 의미며, 사기에 경후 때에 뇌물을 바쳐 후작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에 방백의 권위를 잃어 보통의 제후와 같은 칭호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771년]] [[견융]]에 의해 서주의 수도 [[호경]]이 함락되었을 때 [[주 평왕]]의 요청으로 [[위 무공]]이 [[진 (춘추, 晉)|진(晉)]], [[진나라|진(秦)]]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작이 되었다. 이때 위 무공이 주 왕실의 사도가 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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