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춘추 전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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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衞, 기원전 11세기? ~ 기원전209년?[[기원전 209년]])는 [[중국]] [[주나라]]의 [[제후국]]이자 [[춘추 전국 시대]]의 주요 국가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그 작위는 후작으로, 유력한 동성주나라와 동성인 제후국 중의 하나였다. 위나라는 [[상나라|상]](商)이 주에[[서주]]에 의해 멸망한 직후 [[서주 무왕]]의 친동생인 [[강숙]]이 상의 수도수도였던 [[조가]](朝歌)와 그 주위의 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다. 처음의 봉호는 위가 아니었으나 점차 그 영토가 성장함으로써 국호를 위로 바꿨다.
 
《사기》에 따르면,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은 후 2대 [[위 강백]]부터 7대 위후인 [[위 정백]]까지 '백'으로 일컫다가 위 경후 때에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를 칭했다. 이에 대해,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강고》에 강숙을 “맹후”라 부른 구절을 들어, 강숙은 후작이었고 또 제후의 맏이(맹)로서 '방백'이었기 때문에 이후 강숙의 후예들이 '백'을 칭한 것은 '방백'의 의미며, 사기에 경후 때에 뇌물을 바쳐 후작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에 방백의 권위를 잃어 보통의 제후와 같은 칭호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771년]] [[견융]]에 의해 서주의 수도 [[호경]]이 함락되었을 때 [[주 평왕]]의 요청으로 [[위 무공]]이 [[진 (춘추, 晉)|진(晉)]], [[진나라|진(秦)]]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작이 되었다. 이때 위 무공이 주 왕실의 사도가 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