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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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2-08-01}}
{{전쟁 정보
|분쟁=4·124•12 사건
|전체=[[국공내전]]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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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1=[[파일:Naval Jack of the Republic of China.svg|22px|국민당 기]] [[바이충시]]
|지휘관2=[[파일:Flag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svg|22px|중국 공산당 기]] [[천두슈]]
|병력1= 국민당군 약 5천명, 상하이 조직폭력단원조직단원 약 천명
|병력2= 공산당원, 상하이 노동자들 약 수천명
|사상자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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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24•12 사건'''은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발생한 [[중국 국민당]]의 중공 초기 혁명 진영에 대한 무력을 동원한 진압과 공격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소련에 의해 진행된 [[제1차 국공 합작]]이 종료됨을 상징하였으며, 제1차 [[국공 내전]]이 이어지게 되었다.
 
== 개요 ==
[[북벌 (국민당)|북벌]] 기간 중 [[1927년]],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공격으로 공산당의공산당원의 혁명이 타격을 입었고 소련에 의한 [[제1차 국공합작]]의 종결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국민당집권당 쪽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숙청, 정화(이른바 {{zh|t=淸黨|p=qīng dǎng|h=청당}})’으로 '''청당'''이라 불렀고, 반대반대파 진영은쪽에서는 ‘공산 혁명 기도를 막았다’는 뜻에서 '''‘4·12‘4•12 반혁명정변({{zh|s=四一二反革命政变}})’''' 또는 '''‘4·12‘4•12 참안({{llang|zh|四一二慘案}})’'''으로 불렀다.
 
이 사건 이후 몇 달 동안 중국 전역에 공산당의 무장혁명에 대한 대대적인 경계와 숙청이 이뤄져 공산주의자, 좌파 당원들이 당에서 축출되었고 수배령이 내려져 많은 인사들이 체포, 투옥, 처형되었다처형되었으며 당원들이 국민당으로 전향하거나 잠시 탈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두슈]]와 더불어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활동해왔던활동했던 [[리다자오]]가 베이징에서 처형되는 등 혁명[[코민테른]]에 의한 혁명은 세력이 입지가꺾이게 줄어들었다되었다.
 
== 배경과 원인 ==
북벌 단행을 위해 소련과 연대했던 쑨원은 1923년부터 소련 및 공산당원에 대한 전략적 포용책을 구축하고 소련의 도움을 받아 [[광저우]]에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전쟁을 위한 무관을 양성하였으며 [[베이징]]을 포함한 북부 지방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1925년 쑨원의 사후, 중국 국민당은 [[왕징웨이]]가 당수에 오르고 [[장제스]]가 군권을 쥐는 체제로 짜여지는 중에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기류가 당내부로 나타났다. 동시에 소련은 [[레닌]] 사후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중국에 친소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혁명 전략을 놓고 경쟁하였는데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국공합작을 수단으로 토지혁명과 민족혁명을 이행해가고자 하였고 국민당은 [[무산계급독재]]가 아닌 국가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 결과 ==
중국 국민당은 이 사건으로무장사건을 공산당을일으켜 공산당원을 당내에서 강제로 축출한 후 중국에 대한 북벌을 완수하고완수한 뒤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고 장제스 또한 당내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고 다시 권력 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국민당은 북벌 후로 일어난 국가 혼란을 수습하고 당체제를 개편한 뒤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 외교적으로 단교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중화민국]] 북양정부를 지원했던 서방의 시장경제 세력과 화해 노력을 하였다.
 
[[1927년]]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대시국 선언을 발표해발표하여 제1차 국공 합작의 종료를 선언하고 이후 같은 해 [[8월 1일]] [[난창 봉기]]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번번이 실패하고실패하였다. 도시지역에서 무장혁명의무장혁명 입지가 줄어들면서줄어든 후는 지하로 숨어들숨어들어 수밖에혁명을 없었고계속 시도해갔다. [[마오쩌둥]] 등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장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홍군]]을 조직하여 농촌지역과 산간오지로 들어가잠입하여 암중모색에활동했으며 들어가게사회 각계의 친공파 수행원들이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지하활동에 나서 여론을 이끌게 되었다. 이로써국민당과 공산당 간 정권을 놓고 제1차 [[국공 내전]]이 계속되었다.
 
공산당의 선전활동에 의해서는 또한 이 사건에 대한 반대여론이 증대하는 시발이 되는 사건이었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가 [[1933년]] 발표한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인간의 조건]]》은 바로 상하이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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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27년 중국]]
[[분류:중화민국의 역사]]
[[분류:마오쩌둥]]
[[분류:장제스]]
[[분류:마오쩌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