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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1790년]] 1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4월에 돌아와서 [[코르들리에 클럽]]에 들어갔으며,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습격]] 사건과 반혁명파에 대한 [[9월 학살]]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2년]], [[국민 공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산악파]]에 소속되었다. 의회를 주도하는 [[지롱드파]]를 공격하고 한때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파리 민중을 봉기시켜 궁극적으로 국민 공회에서 추방했다.
 
민중과 급진적인 [[자코뱅당]]의 다리 역할이 되어 [[1793년]] 6월 권력을 얻게 하였다. 짧은 2달 동안 6월에 [[지롱드 파]]가 차츰 몰락하게 되면서 마라는 [[조르주 당통|당통]]과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프랑스의 세명의 요인이 되었다. 여담으로, 유명한 역사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와 절친한 친구사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다비드는 그가 죽은 후 그의 죽음을 미화하여 그린 [[마라의 죽음]]으로 군중들을 선동하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자를 과격하게 숙청하는 독재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반대파인 [[지롱드 당]]에 의해 사망하였다. [[1793년]] 사건 발생 당시 그의 지병이었던 피부병이 악화되어, 활동을 쉬고 집에 틀어 박혀 목욕을 하며 요양하고 있었는데, 면회를 가장한 [[지롱드파]] 지지자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