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신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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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 신성용 (申成用)
| 중시조 =
| 집성촌 = [[충북]] [[청원군청주시]]</ref>, [[전남]] [[여수시]]</ref>, [[전남]] [[고흥군]]</ref>, [[경북]] [[고령군]]
| 인물 = [[신숙주]], [[신면]], [[신정 (1442년)|신정]], [[신용개]], [[신경준]] [[신한평]], [[신윤복]], [[신채호]], [[신성모]], [[신규식]], [[신계륜]]
| 년도 = 2000
| 인구 = 116,966명
| 순위 = 75
| 비고 =
}}
== 시조 ==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본래 [[신라]] 공족(公族)의 후예로 [[고려]]에서 지방 향리인 호장이 되었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올라 그 후손들은 누대로 정착 세거해 온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다.
 
== 인물역사 ==
시조의 5세손 [[신덕린]](申德隣)이 고려말에 좌사의대부와 예조와 공조판서 판서에 이르렀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역임한 아들 [[신포시]](申包翅)를 데리고 [[개성]] [[두류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다시 [[광주]] [[서석산]]으로 옮겨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신포시]](申包翅)의 아들 [[신장]](申檣), [[신평]](申枰), [[신제]](申梯)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맏아들 신장(申檣)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올라 남산지곡을 지었으며, 오랫동안 대제학에 있었고, 둘째 아들 신평(申枰)은 사간원의 정언을 역임했고, 막내 신제(申梯)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신장]](申檣)의 아들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신숙주]](申叔舟)는 6대간 거치면서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랏으나 [[성삼문]] 등 [[사육신]]과는 철천지구徹天之雠로 남게 된다.[[신광수]](申光洙: 첨지중추부사 신호의 아들)는 [[조선]] [[영조]]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주도]]에 가서 그 곳의 풍토·산천·조수·항해 상황 등을 적은 부해록을 지어 문명을 떨쳤고 그의 대표작으로 당시에 널리 애송되었던 관산용마를 지었다. 근세인물로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申潤福)과 사학자 [[신채호]](申采浩),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신홍식]](申洪植) 등이 있다.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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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시조의 5세손 [[신덕린]](申德隣)이 고려말에 좌사의대부와 예조와 공조판서 판서에 이르렀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역임한 아들 [[신포시]](申包翅)를 데리고 [[개성]] [[두류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다시 [[광주]] [[서석산]]으로 옮겨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신포시(申包翅)의 아들 [[신장]](申檣), [[신평]](申枰), [[신제]](申梯)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맏아들 신장(申檣)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올라 남산지곡을 지었으며, 오랫동안 대제학에 있었고, 둘째 아들 신평(申枰)은 사간원의 정언을 역임했고, 막내 신제(申梯)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신장(申檣)의 아들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신숙주(申叔舟)는 6대간 거치면서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랏으나 [[성삼문]] 등 [[사육신]]과는 철천지구徹天之雠로 남게 된다.[[신광수]](申光洙: 첨지중추부사 신호의 아들)는 [[조선]] [[영조]]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주도]]에 가서 그 곳의 풍토·산천·조수·항해 상황 등을 적은 부해록을 지어 문명을 떨쳤고 그의 대표작으로 당시에 널리 애송되었던 관산용마를 지었다. 근세인물로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申潤福)과 사학자 [[신채호]](申采浩),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신홍식]](申洪植) 등이 있다.
 
== 집성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