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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관도 전투]]에서는 원소에게서 구원을 요청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후 여남에서 유비가 몸을 의탁해 오자, 그를 받아들였다. 조조가 요동에 원정한 사이, 유비는 조조의 본거지를 급습하자고 진언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조조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유비를 [[신야]](新野)<ref>현재 하남성 남양시 신야현. </ref>에 주둔시켰다.
 
같은 해 유표는 자신을 위협하는 유일한 인물인 [[손책]]이 죽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후한 헌제에 대한 조공은 완전히 끊고 황제와 복식을 동일하게 하는 등의 칭제행위를 감행하며 제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유표를 동탁과 하등 진배없는 놈이라 평가했다.
 
[[208년]] 8월 병으로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남양태수(南陽太守) 민사(旻思) 등이 향리의 유지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시신을 운구하였다. 아들은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에 임명되었고, 조정의 허락을 받아 고향에서 장사지냈다.<ref nam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