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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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天符經)》은 [[대종교]]의 경전 중 하나로, [[1975년]] 교무회의에서 채택되었다. 현재는 [[환인]](桓因)이 [[환웅]](桓雄)에게 전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17년경 최초의 등장 시에는 [[단군교]]의 경전이었다. 실제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17년으로 [[단군교]](檀君敎)에서 처음으로 언급, 유포하기 시작하여 1920년경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1921년 [[단군교]]의 기관지 《[[단탁]]》에 의해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대종교]]에서는 한참 후인 1975년이 되어서야 기본 경전으로 정식 채택하였다채택되었다. 대종교에서는 단군 시기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한국사학계에서는 위작이라 보고 있다.
 
전문 81자로, 난해한 숫자와 교리를 담고 있어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다.
 
== 전래 및 수용 ==
《천부경》은 [[대종교]]의 중광([[1909년]])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않았다. 《천부경》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17년 [[계연수]]가 [[단군교]]에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이다보내면서부터다. 편지에 따르면 [[계연수]]는 [[1916년]] 9월 9일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도중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인용문|동방의 현인 선진(仙眞) [[최치원]]이 말하기를 [[단군]](檀君)의 《천부경》 팔십일 자는 [[신지]](神志)의 [[전서|전문]](篆文)인데 옛 비석에서 발견되었다. 그 글자를 해석해 보고 지금의 [[묘향산]]으로 추정되는 [[묘향산|백산]](白山)에 각을 해두었다 (라고 최치원은 말하였다). 나는 살펴보건대 [[최치원]]이 [[당나라]]에 가서 진사(進士)가 되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신선이 되고 난 후 이 경문(經文)이 작년 정사년(丁巳年; [[1917년]])에 와서 처음으로 [[평안북도]] 영변(寧邊) [[묘향산|백산]]에서 출현하였다. 약초를 캐는 도인 [[계연수]]라는 분이 [[묘향산|백산]]의 약초를 캐기 위해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갔는데 '''석벽'''에서 이 글자를 발견하고 조사(照寫)했다고 한다. 나는 이미 《정신철학》을 편성하고 바야흐로 인쇄에 맡길 것을 계획하였을 때 우연히 유학자 [[윤효정]]으로부터 《천부경》을 구득하였는데 참으로 하늘이 주신 기이한 일이었다.|[[전병훈]]|《정신철학통편》([[1920년]])<ref>《정신철학통편》, 윤창대 주해, 우리출판사, 2004년</ref><ref>현존하는 책 중 '천부경'의 내용에 대해 최초로 거론한 책이다. 천부경의 발견된 경위를 밝혔다.</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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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단군교]]에서 공개한 이후 김용기, 강우 등의 일부 대종교 인사들이 관심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대종교]] 총본사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윤세복]]이 귀국하여 [[대종교]]를 재건하였을 때에도 역시 《천부경》은 [[대종교]]의 경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윤세복]]의 사후 [[단군교]] 신자들이 대거 종단에 참여하게 되면서 [[단군교]] 계열의 경전들도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1975년]]에 이르러서야이르러 [[대종교]]는 《천부경》과 《[[참전계경]]》을 정식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 전문 ==
{{위키문헌|천부경}}
전문은 총 81자이다81자다.<ref>판본 사이에서 다른 부분은 굵은 글씨체로 표시</ref>
 
{| border="2" style="width: 55em;"<!--"width: 42em; font-size: 80%;"--> style="border-collapse": bordercolor="#111111" cellspacing="0"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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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이 실려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 《천부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단군교]] 《천부경》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환단고기》의 저자인 [[계연수]]는 [[1911년]]에 《환단고기》를 썼다. 그런데 [[단군교]]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계연수]]가 《천부경》을 처음 발견한 때는 1916년이다. 그러므로 [[계연수]]는 《환단고기》에 자신이 직접 적어 넣었던 《천부경》을 5년 후에 처음 발견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 단군교는 원래 [[나철]]이 창시한 종교로서민족 항일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10년]]에 일제에 조선이 병합되기 직전 [[나철]]은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만주로 나가 일제와 대립하였다. 이때 이러한 [[나철]]의 노선에 반발하였던 [[정훈모]]는 수하의 친일파들과 함께 조선에 남아 [[대종교#정훈모의 단군교|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새 종단을 세웠다. 이로써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와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는 친일 교단인 단군교가 분리·양립하게 되었다종교다. 현재 최초의 출전으로 지목되는 [[전병훈]]의 저서 《정신철학통편》(1920) 에 따르면 《천부경》을 전한 [[윤효정]]은 당시 단군교의 대선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천부경의 유래를 밝힌 <계연수기서> 에 따르면 [[계연수]]는 "《천부경》을 발견, 서울의 단군교당에 전했다"고 하는데, 여기의 단군교당이란 바로 나철과 분파된 [[정훈모]]의 [[단군교]]를 말하는 것이다. 더하여 《정신철학통편》에 기재된 《천부경》의 유래는 [[단군교]]가 주장한 것과 같은 것으로, 결국 원 출전은 [[단군교]]인 것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확실하다. 삿사 미츠아키의 연구에 따르면 1916년 나철이 독립운동을 호소하며 목숨을 끊은 이후 그 파장이 커지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친일 교단인 단군교 측에서 1917년부터 천부경이라는 가공의 경전에 대한 소식을 유포한 것으로 보인다.<ref>삿사 미츠아키, 〈한말·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 대종교·단군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ref>
삿사 미츠아키의 연구에 따르면 1916년 나철이 독립운동을 호소하며 목숨을 끊은 이후 그 파장이 커지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단군교 측에서 1917년부터 천부경이라는 가공의 경전에 대한 소식을 유포한 것으로 보인다<ref>삿사 미츠아키, 〈한말·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 대종교·단군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ref>고 주장하였으나, 근거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정훈모는 1913년에 천부경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새 자료가 나왔기 때문이다.<ref>《단재 정훈모 전집》2, 아라, 1915, 26~27쪽.</ref>
 
== 주해서 ==
* 김영의, 《천부경 주해》《단재 정훈모 전집》1, 아라, 2015.
* [[김택영]](金澤榮), 《소호당전집》, [[1922년]]1922.<ref>金洙眞, 단군 천부경의 초기주석 연구, [[원광대학교]]원광대 동양학대학원, 2005년2005.</ref>
* 계연수, 《천부경요해발(天符經要解跋)》, [[1899년]]<ref>윤창대 주해, 《정신철학통편》, 우리출판사, 2004년</ref>
* 단해(檀海) 이관집(李觀楫)[[이유립]], 《천부경직해천부경요해(天符經解)》, 1953.
* 계연수, 《천부경요해발(天符經要解跋)》, [[1899년]]<ref>전병훈/윤창대 주해, 《정신철학통편》, 우리출판사, 2004년</ref>2004.
* [[이유립]], 《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 [[1953년]]
 
== 같이 보기 ==
* [[삼일신고]]
* [[참전계경]]
* [[부도지]]
* [[환단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