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릴로 프린치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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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11-25}}
[[파일:Gavrilloprincip.jpg|thumb|250px|형무소에서에서 찍은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진]]
'''가브릴로 프린치프'''({{llang|bs|Gavrilo Princip}}, {{llang|sr|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1894년]] [[6월 25일]] ~ [[1918년]] [[4월 28일]])는 [[남슬라브]] 통일을 목표로 삼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로, [[오스트리아]]의 [[추정상속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조피 호테크|조피]]를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저격, 살해하였다. 프린치프가 혼자 벌인 일은 아니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자들과 우파 성격의 단체를 결성하여 벌인 사건이다.사건인데,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이어진 [[사라예보 사건]]이다.
 
당시 범슬라브주의의 한 갈래로 나온 [[남슬라브 운동]]은 [[1877년]]을 전후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세르비아]]가 주도하였다. 당시 [[보스니아]]도 세르비아와 합치며 독립하려 하였으나 1878년 [[베를린 조약 (1878년)|베를린 조약]]으로 인하여 세르비아 왕국만이 독립하고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넘어갔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 프린치프를 비롯한 남슬라브주의자들은 보스니아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을 원했는데,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세르비아]]를 제지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따라서그런데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영토 내에서 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담긴 [[최후통첩]]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요구를 대부분 수락한다고 밝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프린치프는 재판을 거쳐 징역형을 언도받았으며, 전쟁이 끝나기 전에 감옥에서 25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commons|Gavrilo Princip}}
{{기본정렬:프린치프, 가브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