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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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이 청조의 고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된 시기는 [[1861년]]의 [[신유정변]]으로 [[서태후]]와 [[공친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면서 [[청일전쟁]](1894년)으로 일본에 패할 때까지의 약 30년 동안을 말한다.
 
[[1860년]]의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으로 [[함풍제]]는 열하(熱河)로 도망쳤으며, 연합군은 청조의 위신을 짓밟기 위해 [[원명원]]을 불태워 버렸다. [[아편전쟁]] 이후 청조의 위기는 그 절정에 이르고 황제의 명을 받아 사태수습에 나선 [[공친왕]]은 연합군의 요구를 거의 받아들여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한편 [[함풍제]]는 열하에서 병사하고 6살이6살에 [[동치제]]가 즉위했다. 이 무렵 궁정내부에 '신유정변'이 발생하여 [[서태후]]가 섭정을 하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의정왕(議政王)과 군기대신(軍機大臣)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1861년]] 청조는 구미열강과의 외교문제를 전담할 [[총리아문]]을 설치하였다. 총리아문은 단순한 외교문제만을 취급하지 않고 통상(通商)을 포함하여 무기의 구입까지 서양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는 기관이다. 군기처와의 관계는 명문규정은 없으나 군기대신이 총리아문의 장관인 총서대신을 겸하여 군기처의 분국(分國)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신정권의 권력핵심에 해당하였다. 유럽 열강은 이 같은 타협적인 [[서태후]]와 [[공친왕]] 정권에 대하여 협조정책을 취하고 청조와 [[태평천국]]군에 대해 취하던 중립적 자세를 버리고 청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제공하면서 근대적 산업기술과 자본협력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대외관계를 수습한 청조의 관료들은 서구의 근대적 무기를 이용하여 [[태평천국]]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영국으로부터 군함의 도입과 영국식 군사훈련을 계획하였고, 군기대신 [[:zh:文祥|문상]]은 러시아로부터 제공받은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신기영'(神機營)을 창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