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8번째 줄:
어양(漁陽) 사람 [[장순 (후한)|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과 요서속국(遼西屬國)을 공격하였다. 공손찬은 병사를 이끌어 장순을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공으로 기도위(騎都尉)로 승진됐다. [[오환]](烏丸)의 탐지왕이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분위장군(奮威將軍)에 계후가 되고 북평태수(北平太守)까지 올랐다. 공손찬은 궁술에 뛰어난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부하 수십 명은 모두 백마를 타고 있었으므로 ‘백마의종(白馬義從)’으로 불렸으며 변경의 이민족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ref>劉虞公孫瓚陶謙 열전</ref>
 
그러나 유주목(幽州牧)에 황족 [[유우 (후한)|유우]](劉虞)가 부임하여 덕으로 이민족을 복종시키자, 무력으로 다스리던 공손찬과 대립이 일어났다. 한때는 [[원소 (후한)|원소]](袁紹)까지도 위협하여 기주(冀州) · 청주(靑州) · 연주(兗州)를 지배하였지만 [[반하 전투]]에서 원소에게 참패하게 되자 세력을 잃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공손찬의 야심을 두려워한 유우에게 공격당하지만, 이를 격파하여 그를 사로잡았다.‘공손찬은 [[황제]]라고 자칭했다’고 무고하여 유우를 처형하였고, 유주를 탈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수단으로 민심을 잃게 되었으며 유우를 살해한 일로 원소는 자신의 세력이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손찬의 목만은 반드시 베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원소는 유우를 황제로 추대해서 [[동탁]]과 맞려고맞서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유우와는 매우 깊은 친분을 과시하는 사이였다.
 
[[건안]](建安) 3년([[198년]]), 원소의 대군에 농성전으로 대항하였으나, 다음해 봄 아들 [[공손속]](公孫續)을 사신으로 보내 [[장연]](張燕)의 구원을 받아 봉화를 신호로 안팎에서 협공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사자 [[문칙]](文則)이 원소의 척후병에게 사로잡혔고, 원소는 신호를 반대로 취해 거짓 봉화를 올렸다. 공손찬은 봉화에 응하여 출병하였으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만다. 공손찬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원소 (후한)|원소]]군이 지하도를 파 안에 불을 지르자, 성벽 기초가 불타 무너지고, 원소군이 입성하자 패배를 인정하고 불타는 역경루 속에서 처자와 함께 자살하였다.<ref>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