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양민 학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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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개요 ==
[[6·25 전쟁]] 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조선인민유격대|공비]] 소탕을 위하여 주둔하였던 대한민국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연대장 [[오익경]](吳益慶) 대령,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민간인 학살 범죄로, 동년 [[3월 29일]] 동군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보고로 공개되었다. 동년 [[2월 11일]] 동대대장 직접 지휘로 부락민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 후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500여명을(한동석 소령이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 학살했다고 보고했다.)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국회|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1922년)|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책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朴榮輔)를 끌어다 생화장 (生火葬)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ref>{{웹 인용
| url = http://www.sisapres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0045
| 제목 = <nowiki>산청·함양 양민도 705명 학살 ‘거창 학살 사건’으로 축소·은폐…4일간 3개郡 1천4백여 주민‘사냥’</no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