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Hamemers (토론 | 기여)
Hamemers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3번째 줄:
'''루트비히 4세'''(Ludwig IV, Louis IV) 또는 '''루트비히 유아왕'''(Ludwig the Child, Louos the Child, [[893년]] [[7월]]/[[9월]] – [[911년]] 9월 24일)은 [[동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조|카롤링거 가문]]의 [[독일의 군주|국왕]]이다. 또한 [[로트링겐]]의 군주이기도 했다. 황제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의 적자이다.
 
[[899년]] [[12월]] 부왕이 죽자 7세에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900년]] [[로트링겐]]의 폭동으로 서출 이복 형 [[츠벤티볼트]]가 암살되자 [[로트링겐]]의 왕도 겸임하였으나 [[911년]]에 사망하였다. 루트비히의 치세기간 중 [[마자르 족]]의 계속된 약탈과 침입으로 국경은 황폐화되었고, 루트비히는 [[907년]]이 되어서야 왕국의 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는 후계자른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단절되었다단절되었으며, [[로트링겐]]은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 (서프랑크)|샤를 단순왕]]에게로 넘어갔다.
 
== 생애 ==
38번째 줄:
 
== 기타 ==
그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레니에 1세]]를 공작으로 선출한다. 로렌의 귀족들은 다른 왕을 선출하는 대신 [[카롤링거 왕조]] 출신의 군주를 받들기로 하고 [[서프랑크의 샤를 3세]]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그를 왕으로 받들었다. 이후 1150년대까지 독일과 프랑스는 로렌의 영유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게 되었지만, 로렌은 점차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슈바벤]]과 [[바이에른]], [[작센]]은 거의 반 독립화되어 스스로 자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