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3세 카에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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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년]] [[7월]] 그는 다시한번 이탈리아를 침공하는데 이번에도 [[바이에른]] 군대의 도움을 받은 베렝가리오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베로나]] 시내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에게 위치가 노출된 그는 [[성 페트로의 교회]]의 성소 안에 숨었지만, 붙잡혀 [[베로나]]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7월 21일]] 그는 서약을 깬 죄목으로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그래서 그의 별명이 '''맹인왕'''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황제의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카롤링거 왕조]]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것이었고 실패로 끝났다.
 
프로방스의 당시 수도인 [[빈]]으로 돌아온 루트비히는 그후로도 몇 년간 프로방스를 통치했지만, [[911년]] 이후 사실상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실권은 루트비히의 먼 친척이자 매제인 아를의 백작인 [[이탈리아의 위그|위그]]에게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장님으로 살았다. [[이탈리아의 위그|위그]]는 루트비히의 여동생 윌라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로마 황제라 칭하고, 행동에 있어서 로마 황제로서의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924년]]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들의 초빙을 받은 상[[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 (부르고뉴)|루돌프 2세]]가 이탈리아의 왕위를 차지했는데, 928년 아를의 위그에게 지위를 양도하였다. 루트비히는 [[928년]] [[7월 5일]] [[아를]]에서 사망했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