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2세 (아키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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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 2세(Pepin II of Aquitaine, [[823년]] - [[864년]](?))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 [[아키텐]]의 세 번째 군주이다. [[경건왕 루트비히]]의 손자이고 [[아키텐의 피핀 1세]]의 아들이다. 동생은 랭스 대주교 샤를이다. [[838년]]부터 그는 [[아키텐의 군주]]였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아키텐]]을 요구하는 배다른 삼촌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와 전쟁을 벌였다. 종종 그와 같은 이름의 선조로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프랑크 왕국]] 궁재이자 [[프랑크 공작]]인 [[피핀 2세]]([[714년]] 사망)과 혼동되기도 한다.
 
어머니는 마들렌느 출신 인고베르그 또는 인겔트루드로, [[838년]] [[12월]] 그의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아키텐의 피핀 1세]]가 갑자기 죽자 할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대머리 카를]]을 [[아키텐]]의 왕으로 봉했으나 [[아키텐]]의 귀족들은 그를 추대했다. 그 뒤 이복 삼촌 [[대머리 카를]]과 싸우다가 [[855년]]무럽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에 의해 사로잡히고 강제 축출당했으며, [[세인트 메다르]]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의 동생인 샤를은 강제로 머리깎여서 승려가 되었다. 피핀 2세는 [[아키텐]]을 되찾기 위해 [[바이킹 족]] 등과도 손잡았으나 [[864년]] [[카를 2세]]에 의해 사로잡혀 [[생리스]] 감옥에서 사망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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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텐 국왕직 승계와 분쟁 ===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는 [[아키텐]]의 국왕으로 있다가 [[정신질환]]의 발병으로 [[838년]]에 사망했다. [[아키텐]] 주민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독립하고 싶어하였고, [[838년]] [[12월]] 말,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의 죽음에 따라 피핀 2세가 [[아키텐의 군주]]로 내정되었다. 피핀 2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후처 유디트에게서 얻은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 르 쇼브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아키텐]]의 귀족들은 반발, 피핀 2세를 [[아키텐의 군주]]로 추대하였다.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했다. 카를은 [[832년]] [[9월]] [[리모]]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된 것을 근거로 아키텐의 왕위를 계속 요구했다.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아키텐]]에 사자를 보내 피핀 2세를 [[아헨]]으로 보내고 대신 총독을 파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키텐의 귀족들은 거부했다. 이후 피핀 2세는 배다른 삼촌 대머리 [[카를 2세]]와 수시로 전쟁을 벌였다. [[841년]]까지 [[아키텐]]은 총독의 통치하에 있었고, 아키텐의 총독은 피핀 2세의 큰아버지인 [[로타르 1세]]였다. 조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하면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다시 [[아키텐]]을 요구했고, [[841년]] 피핀 2세는 다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와 퐁트누아 앙 퓌세(Fontenoy-en-Puisay)에서 맞붙었다. 이때 로타르 1세는 피핀을 지원하였다. [[841년]] 피핀 2세와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의 [[퐁트누아 전투]]에 큰아버지 [[로타르 1세]]가 지원하였으나 피핀 2세가 크게 패배하였다. [[로타르 1세]]와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가 피핀을 지원했고, [[퐁트누아 전투]]에서 결국 대머리 [[카를 2세]]를 꺾고, 피핀 2세는 정식으로 [[아키텐 왕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피핀에게 [[아키텐]]이 반환되자 대머리 [[카를]]은 반발,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피핀 2세의 실질적 통치는 [[848년]] 또는 [[852년]]까지였다.
 
[[842년]] 또는 [[843년]]에 피핀 2세는 [[서프랑크]]를 침공, [[툴루즈]]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툴루즈]]와 [[라우구에]](Rouergue)의 [[백작]] [[툴루즈의 프레도론]](Frédolon)가 그를 배신하여 카를의 편에 가담하였다. [[844년]] 피핀 2세는 [[바이킹 족]] 모험가 [[야를 오스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핀은 야를 오스카에게 서프랑크 왕국의 땅을 약탈해서 정복하면 그 지역에 정착지를 주겠다고 하였다. 피핀과 [[야를 오스카]]는 [[서프랑크 왕국]]의 [[가론]]과 [[툴루즈]] 일대를 약탈했다. [[845년]] [[6월 5일]] 피핀은 [[생 브누아-쉬르-루아르]]에서 [[카를 2세]]와 협정하였다. [[아키텐]] 지역의 [[푸아투]], 상통주(Saintonge), 앙구모아(Angoumois)를 [[카를 2세]]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단기간 휴전하였다.

[[845년]] [[보르도]] [[공작]] [[세귄 2세 (보르도)|세귄]]이 피핀에게로 망명해왔다. 피핀은 세귄에게 줄 정착지로 [[바스코눔]](Wasconum) [[공작]]령을 신설하고 공작에 임명했다. 동시에 피핀 2세는 [[가스코뉴]]의 [[백작]] [[산초 2세 산시온]]에게 도움을 청했다. [[산초 2세 산시온]]은 그의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가 자신의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을 상대로 전쟁할 때 도운 인물이었다. 한편 [[보르도]]는 [[아키텐]]의 가장 큰 도시로, [[보르도]] 지역이 대머리 [[카를 2세]]의 수중에 들어가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보르도]]는 바로 [[847년]] [[야를 오스카]]의 [[바이킹]] 군대에 의해 회복되었다. 시민들 중에는 [[유대인]] 및 피핀 2세의 지지파 게릴라들도 있었다. 한편 피핀 2세는 이교도 해적과도 손을 잡았다. 한편 피핀은 [[과음]]과 다소 나태한 생활에 빠졌고, [[848년]] 무렵에 이르러 [[아키텐]] 귀족들 중 피핀에 대한 지지도는 줄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동생 [[아키텐의 샤를]]이 [[아키텐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 체포와 투옥,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