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2세 (아키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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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활동 ===
[[823년]] 당시 [[카롤링거 제국]] 황제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자,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와 마들렌느 출신 인고베르그(Ingoberge) 또는 인겔트루드(Ingeltrude)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은 랭스 대주교 [[아키텐의 샤를]]이다. 일설에는 피핀 2세의 어머니는 [[니벨룽 가문]] 출신 테이베르트 마드리에(Thibert Madrie)의 딸 라이가르트(Ringarde)라는 설도 있다. [[서프랑크 왕국]]의 역사가였던 [[니타르트]]에 의하면 피핀 2세는 아버지 피핀 1세의 장남이라 한다.<ref>[http://www.thelatinlibrary.com/nithardus1.html#ES Nithardus, Historiae, liber I: par. 8] {{la}}</ref>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는 자신의 형 [[로타르 1세]], 동생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와 함께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에게 반항하여 쿠테타를 기도한 바 있다. 피핀 2세가 태어날 무렵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후처 [[바이에른의 유디트]]에게서 아들 대머리 [[카를 2세]]를 얻었고, 다시 상속령을 수정하여 세 아들에게 분배된 영토의 일부를 대머리 [[카를 2세]] 르 쇼브에게 [[알레만니아]]와 [[아키텐]]을 넘기려 하자, [[로타르 1세]],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 3형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아키텐 국왕직 승계와 분쟁 ===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는 [[아키텐]]의 국왕으로 있다가 [[정신질환]]의 발병으로 [[838년]]에 사망했다. [[아키텐]] 주민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독립하고 싶어하였고, [[838년]] [[12월]] 말,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의 죽음에 따라 피핀 2세가 [[아키텐의 군주]]로 내정되었다. 피핀 2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후처 유디트에게서 얻은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 르 쇼브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아키텐]]의 귀족들은 반발, [[카바네의 아데마르]](Ademar de Chabannes), [[푸아티에]] [[백작]] 에메노네(Emenone) 등은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을 선언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2세를 [[아키텐의 군주]]로 추대하였다. 아키텐 귀족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피핀 2세가 사실상 국왕으로 추대되자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푸아투]] 지역을 공격했지만 [[아키텐]] 군사들에게 패배하고 자신의 계획을 철회했다. 카를은 [[832년]] [[9월]] [[리모]]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된 것을 근거로 아키텐의 왕위를 계속 요구했다.
 
[[839년]]의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피핀 2세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아헨]]으로 유학할 것을 지시했다.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아키텐]]에 사자를 보내 피핀 2세를 [[아헨]]으로 보내고 대신 총독을 파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키텐의 귀족들은 거부했다. 이후 피핀 2세는 배다른 삼촌 대머리 [[카를 2세]]와 수시로 전쟁을 벌였다. [[841년]]까지 [[아키텐]]은 총독의 통치하에 있었고, 아키텐의 총독은 피핀 2세의 큰아버지인 [[로타르 1세]]였다. 조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하면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다시 [[아키텐]]을 요구했고, [[841년]] 피핀 2세는 다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와 퐁트누아 앙 퓌세(Fontenoy-en-Puisay)에서 맞붙었다. 이때 로타르 1세는 피핀을 지원하였다. [[841년]] 피핀 2세와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의 [[퐁트누아 전투]]에 큰아버지 [[로타르 1세]]가 지원하였으나 피핀 2세가 크게 패배하였다. [[로타르 1세]]와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가 피핀을 지원했고, [[퐁트누아 전투]]에서 결국 대머리 [[카를 2세]]를 꺾고, 피핀 2세는 정식으로 [[아키텐 왕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피핀에게 [[아키텐]]이 반환되자 대머리 [[카를]]은 반발,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피핀 2세의 실질적 통치는 [[848년]] 또는 [[852년]]까지였다.
 
[[842년]] 또는 [[843년]]에 피핀 2세는 [[서프랑크]]를 침공, [[툴루즈]]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툴루즈]]와 [[라우구에]](Rouergue)의 [[백작]] [[툴루즈의 프레도론]](Frédolon)가 그를 배신하여 카를의 편에 가담하였다. [[844년]] 피핀 2세는 [[바이킹 족]] 모험가 [[야를 오스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핀은 야를 오스카에게 서프랑크 왕국의 땅을 약탈해서 정복하면 그 지역에 정착지를 주겠다고 하였다. 피핀과 [[야를 오스카]]는 [[서프랑크 왕국]]의 [[가론]]과 [[툴루즈]] 일대를 약탈했다. [[845년]] [[6월 5일]] 피핀은 [[생 브누아-쉬르-루아르]]에서 [[카를 2세]]와 협정하였다. [[아키텐]] 지역의 [[푸아투]], 상통주(Saintonge), 앙구모아(Angoumois)를 [[카를 2세]]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단기간 휴전하였다.
[[854년]] 형제 샤를과 함께 세인트 메다르 수도원에서 탈출에 성공한 피핀 2세는 대머리 [[카를 2세]]에 맞서 싸울 [[바이킹 족]] [[용병]]을 고용하였다. 피핀은 자신의 옛 영토에 [[바이킹 족]]의 정착을 주도했다. 대머리 [[카를 2세]]의 아들 [[샤를 3세 (아키텐)|유아왕 샤를]]은 군사를 이끌고 [[푸아티에]] 지역을 공격하였다. [[855년]] [[10월]] [[라모]]에서 열린 [[아키텐]]의 귀족회의에서 [[샤를 3세 (아키텐)|유아왕 샤를]]을 아키텐 왕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피핀 2세는 자신의 옛 영토인 [[루아르 계곡]]과 [[푸아티에]], [[앙굴렘]], [[페리]], [[리모]], [[클레르몽]], [[부르주]] 등을 차례로 회복하였고, 대머리 [[카를 2세]]는 피핀 2세를 진압하려고 힘썼다.
 
[[864년]] 무렵 피핀 2세가 [[바이킹 족]]에 가입해서 [[바이킹]]이 된 것으로 [[그리스도교]] 사회에 확산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예배 대신, [[바이킹 족]]의 하나로 살며 바이킹의 신을 숭배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툴루즈]] 지역을 공격할 때 [[바이킹 족]]에 합류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툴루즈 지역을 공략하던 중, [[카를 2세]]의 추격자에 의해 사로잡혔다. 그는 [[864년]] 황제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이탈리아인 루트비히]]의 명의의 [[파이스트레스의 칙령]]에 의해 면직되고, 피핀 2세는 곧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한등급 감하여 [[상 리스]] 감옥에 수감되었다. [[864년]] 피핀은 [[상 리스]]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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