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2세 (아키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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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 2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후처 유디트에게서 얻은 대머리 [[카를 2세]] 르 쇼브를 [[832년]] [[9월]] [[리모]]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때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는 자신의 부왕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러자 피핀 2세의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를 비롯한 형제들의 부왕 경건왕 루트비히에 대한 반란은 더욱 격화되었다.
 
=== 아키텐의 군주 ===
==== 아키텐 국왕직 승계와 분쟁 ====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는 [[아키텐]]의 국왕으로 있다가 [[정신질환]]의 발병으로 [[838년]]에 사망했다. [[아키텐]] 주민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독립하고 싶어하였고, [[838년]] [[12월]] 말,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의 죽음에 따라 피핀 2세가 [[아키텐의 군주]]로 내정되었다. 피핀 2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후처 유디트에게서 얻은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 르 쇼브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아키텐]]의 귀족들은 반발, [[카바네의 아데마르]](Ademar de Chabannes), [[푸아티에]] [[백작]] 에메노네(Emenone) 등은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을 선언했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피핀 2세를 [[아키텐의 군주]]로 추대하였다. 아키텐 귀족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피핀 2세가 사실상 국왕으로 추대되자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푸아투]] 지역을 공격했지만 [[아키텐]] 군사들에게 패배하고 자신의 계획을 철회했다. 카를은 [[832년]] [[9월]] [[리모]]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된 것을 근거로 아키텐의 왕위를 계속 요구했다.
 
[[839년]]의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피핀 2세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카를을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며, 피핀 2세는 [[아헨]]으로 유학할 것을 지시했다.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아키텐]]에 사자를 보내 피핀 2세를 [[아헨]]으로 보내고 대신 총독을 파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키텐의 귀족들은 거부했다. 카를은 아키텐에 대한 통치를 선언했지만 아키텐의 귀족들은 카를을 거부했다. 이후 피핀 2세는 배다른 삼촌 대머리 [[카를 2세]]와 수시로 전쟁을 벌였다. 피핀 2세는 보름스 회의 직후 [[루트비히 1세 (동프랑크)|루트비히 2세 독일인]]에게 의탁, [[작센]]과 [[튀링겐]] 등지를 오가며 생활했다.
 
==== 시민 전쟁 ====
[[841년]]까지 [[아키텐]]은 총독의 통치하에 있었고, 아키텐의 총독은 피핀 2세의 큰아버지인 [[로타르 1세]]였다. 조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사망하면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다시 [[아키텐]]을 요구했고, [[841년]] 피핀 2세는 다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와 퐁트누아 앙 퓌세(Fontenoy-en-Puisay)에서 맞붙었다. 이때 로타르 1세는 피핀을 지원하였다. [[841년]] 피핀 2세와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의 [[퐁트누아 전투]]에 큰아버지 [[로타르 1세]]가 지원하였으나 피핀 2세가 크게 패배하였다. [[로타르 1세]]와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가 피핀을 지원했고, [[퐁트누아 전투]]에서 결국 대머리 [[카를 2세]]를 꺾고, 피핀 2세는 정식으로 [[아키텐 왕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피핀에게 [[아키텐]]이 반환되자 대머리 [[카를]]은 반발,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피핀 2세의 실질적 통치는 [[848년]] 또는 [[852년]]까지였다.
 
[[841년]]부터 [[843년]]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와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가 손잡고 [[로타르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 피핀 2세는 [[로타르 2세]]의 휘하 장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시민 전쟁]]) 이 전쟁에서 [[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독일인 루트비히]]의 군사가 [[로타르 1세]]의 군대를 꺾었는데, 이때 대머리 카를은 [[가스코뉴]]에 있는 피핀에게 보냈다. 피핀 2세는 [[카를 2세]]의 사자를 보자마자 구타하였다. 피핀 2세는 다시 [[아키텐]]으로 후퇴하여 [[카를 2세]]를 상대로 전쟁을 계속하였다. 피핀은 [[아키텐]]으로 돌아가 [[카를 2세]]가 대리 통치자로 파견한 [[툴루즈]] [[백작]] [[베른하르트 드 셉티메니아]](Bernhart de Settimania)를 물러나게 했다.
 
[[842년]] 또는 [[843년]]에 피핀 2세는 [[서프랑크]]를 침공, [[툴루즈]]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툴루즈]]와 [[라우구에]](Rouergue)의 [[백작]] [[툴루즈의 프레도론]](Frédolon)가 그를 배신하여 카를의 편에 가담하였다. [[844년]] 피핀 2세는 [[바이킹 족]] 모험가 [[야를 오스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핀은 야를 오스카에게 서프랑크 왕국의 땅을 약탈해서 정복하면 그 지역에 정착지를 주겠다고 하였다. 피핀과 [[야를 오스카]]는 [[서프랑크 왕국]]의 [[가론]]과 [[툴루즈]] 일대를 약탈했다. [[843년]] 피핀 2세는 [[카를 2세]]와 사로나 섬(Saona)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해에 [[시민 전쟁]]이 종료되고, [[로타르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카를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분할을 할 때,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에게는 [[아키텐]], [[툴루즈]]와 [[셉티메니아]] 등도 분배되었다. [[844년]] 피핀 2세는 [[툴루즈]]의 카운티들과 툴루즈 시내를 공격하여 포위했으며,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 등을 체포했다. [[845년]] [[6월 5일]] 피핀은 [[생 브누아-쉬르-루아르]]에서 [[카를 2세]]와 협정하였다. [[아키텐]] 지역의 [[푸아투]], 상통주(Saintonge), 앙구모아(Angoumois)를 [[카를 2세]]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단기간 휴전하였다.
 
==== 베르덩 조약 이후 ====
[[844년]] 피핀 2세는 [[툴루즈]]의 카운티들과 툴루즈 시내를 공격하여 포위했으며, 셉티메니아의 베른하르트 등을 체포했다. [[845년]] [[6월 5일]] 피핀은 [[생 브누아-쉬르-루아르]]에서 [[카를 2세]]와 협정하였다. [[아키텐]] 지역의 [[푸아투]], 상통주(Saintonge), 앙구모아(Angoumois)를 [[카를 2세]]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단기간 휴전하였다. [[845년]]의 [[로타르 1세]]와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카를은 편지 서신에서 피핀 2세를 [[카를 2세]]의 가신으로 논정하였고, [[카를 2세]]는 [[845년]] [[생 브누아-쉬르-루아르]]에서 피핀 2세를 [[아키텐]]의 전 지역의 주지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피핀은 자신이 카를 2세의 가신으로 정한 것과, 왕에서 주지사로 격하된 지위를 승복하지 않았다.
 
[[845년]] [[보르도]] [[공작]] [[세귄 2세 (보르도)|세귄]]이 피핀에게로 망명해왔다. 피핀은 카를 2세의 휘하에 있던 세귄을 설득해 왔다. 피핀은 세귄에게 줄 정착지로 [[바스코눔]](Wasconum) [[공작]]령을 신설하고 공작에 임명했다. 그러나 세귄은 1년만인 [[846년]]에 사망한다. 동시에 피핀 2세는 [[가스코뉴]]의 [[백작]] [[산초 2세 산시온]]에게 도움을 청했다. [[산초 2세 산시온]]은 그의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가 자신의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을 상대로 전쟁할 때 도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카를 2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된 산초 2세는 그의 요청을 거절한다. 한편 [[보르도]]는 [[아키텐]]의 가장 큰 도시로, [[보르도]] 지역이 대머리 [[카를 2세]]의 수중에 들어가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보르도]]는 바로 [[847년]] [[야를 오스카]]의 [[바이킹]] 군대에 의해 탈환, 회복되었다. 시민들 중에는 [[유대인]] 및 피핀 2세의 지지파 게릴라들도 있었다. 한편 피핀 2세는 이교도 해적과도 손을 잡았다. 한편 피핀은 [[과음]]과 다소 나태한 생활에 빠졌고, [[848년]] 무렵에 이르러 [[아키텐]] 귀족들 중 피핀에 대한 지지도는 줄어들었다. [[848년]] [[6월 6일]]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은 다시 자신이 아키텐 왕임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피핀 2세의 동생 [[아키텐의 샤를]]이 [[아키텐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아키텐의 샤를]]은 [[848년]] [[6월 6일]] [[오를레앙]]에서 자신이 [[아키텐]]의 [[국왕]]이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1년 안에 [[아키텐]]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피핀 2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