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시마 미치후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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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시마 미치후사'''({{lang|ja|来島通総,}}, [[1561년]] ~ [[1597년]] [[10월 26일]]) 는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이요 국]] 출신 전국 무장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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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13년([[1585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國) 정벌군을 맡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에서 선봉으로 이요로 나아가 옛 주군이었던 고노 가문을 쳤다. 이 전공으로 이요 국 가제하야 군(風早郡) 1만 4000석의 다이묘가 된다. 덴쇼 15년([[1587년]])의 [[규슈 정벌]],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공성전에도 참가했다. 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는 연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미치후사가 히데요시와 같은 도요토미(豊臣) 성을 사성받은 적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임진왜란]]([[1592년]])에 참전하였다. 처음에는 시코쿠 세력을 이끌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5번대에 배속되어 [[충청도]](忠淸道) 방면에서 육전에 종사했으나, [[이순신]](李舜臣) 등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가 흔들리자 다시 수군을 지휘해 조선 수군과 맞서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나자 다시 참전, 남원성 공략 당시 6백 명을 거느리고 육군으로써 싸우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함께 수군으로써 [[전라도]](全羅道) 방면의 조선 수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진격했지만, 9월 16일에 [[진도]]의 [[울돌목]]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전사하였다[[작전 중 사망|전사]]하였다([[명량대첩]]). 향년 37세(참고로 미치후사의 형 미치유키는 [[1592년]] [[당포 해전]] 때 전사).
 
== 명량대첩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