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outhSudan (토론 | 기여)
SouthSudan (토론 | 기여)
40번째 줄:
쿠알라룸푸르는 [[1857년]] [[곰박 강]]과 [[클랑 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세워진 도시이다. ([[말레이어]]로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는 “흙탕물의 합류”를 뜻한다.) 정착지는 [[슬랑오르 주|슬랑오르]]의 왕족인 라자 압둘라가 주석 채굴꾼들에게 [[클랑 밸리]](Klang Valley)를 개방하면서 건설되기 시작했다. 87명의 중국인들이 클랑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암팡]] 지역에서 주석 채굴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69명이 토착 역병으로 인해 사망했지만, 주석 광산은 가파른 성장을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채굴꾼들을 상대로 주석과 생활에 필수적인 물품들을 거래하던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이 상인들이 곰박 강과 클랑 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상점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도시가 시작된 것이다.
 
마을이 커짐에 따라, 당시 말라야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인]]들은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지도자를 선임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첫 [[카피탄 치나]](Kapitan Cina, 영어:captain china, 중국인들의 지도자)로 휴 슈(Hiu Siew)를 임명했다. 세 번째 카피탄 치나였던 [[얍 아 로이]](Yap Ah Loy) 때에 와서, 조용한 광산 마을이었던 쿠알라룸푸르는 셀랑고르슬랑오르 주에서 가장 앞선 선진 도시가 되었다. 초기에 쿠알라룸푸르는 [[셀랑고르슬랑오르 내전]]의 중심에 있었는데, 그 내전 가운데 하나는 셀랑고르슬랑오르 왕자들의 주석 광산 채굴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피탄 자리를 놓고 카피탄 얍과 그의 자리를 뺐으려 했던 총 총(Chong Chong)간의 반목에 따른 싸움이었다. 카피탄 얍과 그의 후원자였던 [[텅쿠 쿠딘]](Tengku Kudin)이 승리하였고, 얍의 뛰어난 지도력 하에, 쿠알라룸푸르는 셀랑고르의슬랑오르의 가장 큰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는 내전의 피해를 입은 쿠알라룸푸르를 재건하였고, 셀랑고르슬랑오르 다른 지역의 중국인 채굴꾼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또한 지속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 말레이인 농민들을 쿠알라룸푸르 근교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카피탄 얍의 성공으로, 쿠알라룸푸르는 [[1880년]]에 셀랑고르슬랑오르 주의 주도가 되었다. 그는 쿠알라룸푸르 최초의 학교를 건설하였으며, 무주택자를 위한 보호소를 건설하였다. 얍 자신도 하이 산 비밀결사의 회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도시에서는 갱단간의 싸움도 자주 일어났었다. 얍은 유곽, 카지노, 술집에 허가를 내 주었다. 얍의 사망 후 도시가 번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셀랑고르슬랑오르 주지사였던 [[프랑크 스웨튼햄 경]]의 덕분이었다. [[1896년]], 스웨튼햄의 감독 하에 [[말레이 연방주]]가 만들어지면서, 쿠알라룸푸르는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2년]] [[1월 11일]]에 [[일본군]]이 쿠알라룸푸르를 점령하여 44개월 동안 통치하였다.
49번째 줄:
1957년의 독립 후, 쿠알라룸푸르는 [[말라야 연방]]의 수도였고, 1963년 국명이 [[말레이시아]]로 바뀐 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했다.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머르데카 경기장]]에서 말레이시아의 첫 국무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이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다타란 머르데카]](독립 광장)의 게양대에서는 [[유니언 잭]]이 내려지고 [[말레이시아의 국기]]가 게양되었다. 이곳은 영국령임을 상징하던 장소로, 식민 정부 관료들의 크리켓 경기장이었으며, 말레이시아의 가장 특별한 백인 전용 클럽이었던 [[로열 슬랑오르 클럽]]의 앞에 있던 곳이었다.
 
1972년 시(Bandaraya)로 승격되었으며 [[1974년]]에 쿠알라룸푸르는 슬랑오르 주에서 분리되어 연방령 지역이 되었다.
 
=== 현대 (1990년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