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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인물 정보 | 이름 = 장말손 | 그림 = 작자미상 장말손초상 1476년경 4687.jpg | 그림설명 = 15세기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장말손 초상 |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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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년]]([[조선 성종]] 1) [[장악원]] 부정을 거쳐 행부사직·첨지충추부사·행사직 등을 역임하고, 1479년 해주목사가 되었으며, 1482년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졌다.
 
 
1431년(세종 13) ~ 1486년(성종 17).
 
자 경윤(景胤). 호 송설헌(松雪軒). 시호 안양(安襄). 홍산 현감(鴻山縣監) 증 병조 판서(贈兵曹判書) 옥산군(玉山君) 안량(安良)의 아들. 고려(高麗)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계(桂)의 후손.
 
그는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입격하고 아울러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그는 처음 인동현(仁同縣) 발영전리(拔英田里)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다 관직 생활을 하던 32세 때에 한양의 창동(倉洞)으로 이거하였고, 47세 때에 예천의 화장(花庄)에 살 곳을 정한 후에, 52세가 되어 사직하고 완전히 낙남(落南)하였다. 이때 집의 서쪽에 송설헌을 지었다.
 
그는 생김새가 풍수(豊秀)하고 풍채가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위엄을 지녔다. 아울러 일찍부터 문예를 성취하여, 과거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6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한 그는 11때에 형 장선손(張善孫)・장경손(張敬孫)과 함께 서숙(書塾)에서 공부하였는데, 어긋나거나 실수하지 않은 채로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의 책을 연달아 암송하니, 가문의 큰 기대를 받게 되었다. 그는 공령문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성리설(性理說)을 논변하는 분야에도 통달하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그를 매우 경중하였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에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함길도 병마도사(咸吉道兵馬都事), 예조 좌랑(禮曹佐郞) 등에 임명되었다.
 
길주(吉州)의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도모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세조는 문무(文武)의 장사(壯士) 28인을 선발하여 이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의 막부에서 활약하며 토벌에 참여하였다. 이시애의 반란이 종식되자, 그는 변란을 제압한 공로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에 책봉되었고, 아울러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으로 승진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장악원 정(掌樂院正),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부사직(行副司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사직(行司直), 해주 목사(海州牧使),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었으며, 마침내 연복군(延福君)에 봉하여졌다. 그가 생을 마치자, 조정에서 예(禮)를 두터이 하여 장사를 지내주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증직하였다.
 
그에 관계된 전후 문적(文籍)이 병화를 겪은 나머지 대개 산일(散佚)되었으나, 공신책봉 관계문건 및 화상(畵像) 등의 고문서들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장수면 화기리 종택에 건립된 유물각(遺物閣)에 잘 보전되어 있으며, 조선초기 정치사 및 고문서 연구 등에 중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성종(成宗)이 그에게 내린 사제문(賜祭文) 가운데에 이르기를,
 
 
 
 
性質純慤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고 성실하며
 
學識疏通 학식은 통달하였다네.
 
忠義之道 충성스럽고 의로운 도리는
 
實所佩服 실로 패복(佩服)한 바였네.
 
 
 
 
라고 하였으며,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은 함길도에 근무하고 있던 그에게 「기함길도평사장경윤말손(寄咸吉道評事張景胤末孫)」을 지어 주었고, 공과 더불어 과거 합격 동기이기도 하였던 김종직(金宗直)도 그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金甲貂裘遊子情 황금 갑옷, 담비 갖옷 입은 나그네의 정이
 
蕭蕭落木響邊城 쓸쓸히 낙엽 떨어지는 변방 성에 울리누나.
 
詩書從事詩書將 시서(詩書)에 종사한 유장(儒將)이니
 
喜見妖氛塞外淸 요기가 변방에서 일소될 것을 기쁘게 보리라.
 
 
 
 
라고 하였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장안양공화상찬(張安襄公畫像贊)」을 짓고,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가 「증이조판서안양공행예조참판연복군송설헌장공묘갈명(贈吏曹判書安襄公行禮曹參判延福君松雪軒張公墓碣銘)」을 찬하였다. 이원윤(李源胤)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하였다.
 
후손 장준문(張駿文) 등이 연보(年譜)를 포함한 그에 관한 여러 사적(史蹟)을 정리하여 ������송설헌선생실기(松雪軒先生實紀)������를 간행하였다. 그는 송계서원(松溪書院)에 제향되었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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