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소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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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3-08-09}}
[[파일:Soun Hojo portrait.jpg|230px|right|thumb|호조 소운]]
'''호조 소운'''({{llang|ja|北条早雲}})으로 더 잘 알려진 '''이세 모리토키'''({{llang|ja|伊勢盛時}}, [[1432년]]/[[1456년]]~[[1519년]] [[9월 8일]])는 [[무로마치 시대]] 중후기의 무장으로 [[센고쿠 다이묘]] [[고호조 가문의씨|고호조 가문]]의 시조이다. 이세 소즈이(伊勢宗瑞)라고도 불린다. 호조 소운은 센고쿠 다이묘의 효시라고 할 수 있고, 소운의 활동은 동국(현 [[간토 지방]])의 센고쿠 시대로 접드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실제 이름은 나가우지(長氏)라고 전해내려 오지만, 현재에는 모리토키(盛時)가 정설이다. 통칭은 신쿠로, 호는[[호 (이름)|호]]는 소운안소즈이(早雲庵宗瑞)이다. 생년는 1432년이 정설이지만, 근년에는 1456년 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세 가문이 호조 성으로 바꾼 건 [[호조 우지쓰나]](北条氏綱) 때지만, 통상 호조 소운으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이세 모리토키]]가 살아 생전에 호조 소운이란 이름을 사용한 적은 없다.
 
== 생애 ==
=== 출신 ===
일개 낭인에서 센고쿠 다이묘의 지위에 오른 전형적인 하극상의 예로 보아 온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실제에는 [[무로마치 막부]]의 [[만도코로]](政所)<ref>무로마치 막부의 재정과 영지에 관한 소송을 담당하는 직책</ref>칙사를 역임한 이세 가문의 출신으로 보인다. 1950년대 발표된 후지이 논문이후, 이세 가문 안에서도 [[빗추노쿠니|빗추 국]](備中国)에 살았던 지류로 빗추 국 [[시쓰키 군]] 에하라노쇼 (현재 [[이하라 시]])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막부의 모시쓰기슈(申次衆)<ref>쇼군의 명령이나 서찰을 출납하는 직</ref>의 서찰과 스루가 관련 서찰을 검토한 결과, 기재된 이세 신쿠로 모리토키(伊勢新九郎盛時)라는 인물로 판명이 되었다.
 
근년에 연구에서 소운의 아버지 [[이세 모리사다]](伊勢盛定)가 막부의 마도코로 칙사 [[이세 사다치카]](伊勢貞親)와 함께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모시쓰기슈로써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소운은 이세 모리사다와 [[교토 시|교토]] 이세 가문의 당주로 마도코로 칙사 [[이세 사다쿠니]](伊勢貞国)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결코 신분이 미천한 낭인은 아니었다.
 
소운은 모리사다의 소령 빗추 에하라노쇼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여기서 보냈다고 사료된다. 에하라노쇼에는 분메이 3년 ([[1471년]])으로 된 다이라노 모리토키(平盛時)의 서명으로 된 긴세(禁制)가 남아있다. (단 서명은 후의 것과 다르다.) 더욱이 빗추 국에서는 [[다이도 씨|다이도 가문]](大道寺氏), [[나이토 씨|나이토 가문]](内藤氏), [[가사하라 씨|가사하라 가문]](笠原氏) 등이 있었고, 후에 고호조 가문을 섬기는 가문이었다.
 
=== 막부의 가신으로 ===
오닌 원년 ([[1467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자, [[스루가노쿠니스루가 국|스루가]] 슈고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가 상경하여 동군에 가세하였다. 요시타다는 이세 사다치카를 방문했고, 여기서 소운의 아버지 이세 모리사다를 만나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소운의 누나와 결혼했다고 생각된다. 분메이 5년 ([[1473년]]) 소운 누나 기타카와도노는 다쓰오마루(후에 [[이마가와 우지치카]])를 낳았다.
 
교토에서 소운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義視)를 섬긴다. 하지만, 근년에 연구에 의해 소운의 탄생년도를 1456년으로 보면, 아시카가 요시미가 쇼군 후계자로 대두되는 1464년 ~ 1467년 무렵에는 소운은 10살 전후로 너무 어리고, [[1467년]] 이후로 요시미는 서군에 가담한다. 이 점으로 볼때 의문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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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루가 ===
분메이 8년 ([[1476년]])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도토미노쿠니도토미 국|도토미]]의 [[시오마이사카 전투]]에서 서군의 도토미 슈고 [[시바 요시카도]](斯波義廉)측 호족 요코치 가문과 가쓰마타 가문의 기습으로 전사하였다. 그러나 도토미의 정세는 복잡해서 근년 연구 결과에서는 이들 호족이 동군인 [[시바 요시토]](斯波義良)에 속했다고 사료되어,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같은 동군의 손에 죽었다.
 
이마가와 요시타다의 적자 다쓰오마루는 아직 유아여서 (이설도 있다.) 이 때문에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미우라 가문과 아사히나 가문 등이 이마가와 요시타다의 사촌인 [[오시카 노리미쓰]]를 옹립해, 가독 다툼이 일어난다. 이에 [[이즈 국]]을 거점으로 한 [[호리고에 구보]] 아시카가 가문과 무사시 국을 거점으로 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이 개입하였고, 곧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과 대립하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스루가로 병력을 이끌고 주둔한다.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군에는 이 시기 영걸인 [[오타 도칸]]이 가문의 재상으로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오시카 노리미쓰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인 [[우에스기 마사노리]]의 외손자였다. 이렇게 되어 다쓰오마루를 지지하는 세력 입장에서는 불리한 정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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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이 스루가로 갈 때 아래와 같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호조키(北条記)에서는 소운이 스루가로 갈적에 [[다이도지 시게토키]](大道寺太郎), [[아라키 효고]](荒木兵庫), [[다메 곤베이]](多目権兵衛), [[야마나카 사이지로]](山中才四郎), [[아라카와 마타지로]](荒川又次郎), [[아리타케 효에]](在竹兵衛), 이들 6명과 [[이세노쿠니|이세 국]]에서 신수를 나누어 마시면서 이중 누구 한명이 다이묘로 되면, 다른 이들은 그의 가신이 되겠다는 명세를 했다고 한다. 마치 [[삼국지]]의 도원의 결의와 비슷한 이야기이다.
 
구보료쇼키(公方両将記)에는 [[무쓰노쿠니|무쓰 국]](陸奥国)으로 가던 소운은 스루가 국의 삿타 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겨 곤란해 하던 중, 슈고 부인의 가마를 만나 의복을 받았다고 한다. 가마에 타셨던 분이 작은 어머니인 기타카와도노였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이마가와 가문을 셤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일화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소설 [[하코네노사카|하코네의 언덕]](箱根の坂)에서도 사용되었다.
 
어디까지나 이런 것은 대의를 품은 낭인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이고, 창작이다.
 
분메이 11년 ([[1479년]]) 전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다쓰오마루의 가독계승을 인정하는 어내서를 주었다. 하지만, 다쓰오마루가 15세를 넘겼는데도, 오시카 노리미쓰는 당주에대한당주에 대한 권리를 주지 않았다.
 
조쿄 원년 ([[1487년]]) 소운은 다시 스루가로 향했고, 다쓰오마루를 보좌해 이시와키 성에서 동지를 규합한다. 동년 11월 소운은 거병하여 이마가와야카타를 습격하여 오시카 노리미쓰와 그의 동생 오시카 마고고로를 죽인다. 다쓰오마루는 이마가와야카타에 입성하고, 2년후 성인식을 해 우지치카로 개명한다. 그리고, 정식으로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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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즈 토벌 ===
소운이 호리고에 구보의 아들 [[아시카가 자차마루]](足利茶々丸)를 습격해 멸문하고, [[이즈노쿠니|이즈 국]](伊豆国)을 빼앗은 사건은 구 세력을 멸하고, 신흥세력이 집권하는 이런바 하극상의 효시로 센고쿠 시대 개막을 알리는 일이었다. 정치가 부패한 교토를 버리고, 간토의 평야에 뜻을 세운 소운이었지만, 중앙 정치와 연관된 움직임이 [[이에나가 준지]](家永遵嗣)등의 연구로 밝혀졌다.
 
[[교토쿠의 난]]에서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成氏)가 막부에 대항하는 행동을 하였고, 이에 쇼군의 명령을 받은 이마가와 가문이 가마쿠라를 공격 점령한다. 이에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고가 성]]으로 도주하였고, 고가 구보로 불리며 적대 세력이 되어 막부측의 [[간토칸레관동관령]] 우에스기 가문과 격렬한 전투를 하게 된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아시카가 시게우지를 대신할 가마쿠라 구보로 동생 [[아시카가 마사토모]](政知)를 보내지만, [[고가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의 세력이 워낙 강하여 가마쿠라에 입성할 수 없어 이즈 국에 터를 잡고 [[호리고에 구보]]로 불리게 되었다. 분메이 14년 ([[1483년]]) 고가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간토칸레 우에스기 가문은 화친하였고, 호리고에 구보는 어쩔 수 없이 이즈 국 일국만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아시카가 마사토모에게는 장남 자차마루가 있었지만, 정실 엔만인과의 사이에 아들 준도지(潤童子)와 세이코(清晃)를 두었다. 세이코는 출가하여 교토에 있었다. 이때 아시카가 마사토모는 세력 만회를 하기 위해 [[히노 도미코]](日野富子)와 [[간레]]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와 연락을 해 아들 세이코를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소문이 이었다고, [[1487년]] 다이조인의 승려 [[진손]](尋尊)의 일기에 적고 있다. 역사학자 [[시모야마 하루히사]](下山治久)는 이 계획이 소운과 이마가와 우지치카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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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오 2년 ([[1493년]]) 4월 간레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메이오 정변]]을 일으켜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추방하고, 세이코를 쇼군으로 옹립한다. 세이코는 환속하여 요시토(義遐)라고 개명한다. (후에 [[아시카가 요시즈미|요시즈미]](義澄)로 개명하였다.) 권력을 잡은 요시토는 막부 관료의 경력이 있는 소운에게 형과 어머니의 원수 아시카가 자차마루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소운은 동년 여름 아니면 가을 무렵 이즈 호리고에 어소의 자차마루를 공격했다. 이 사건을 이즈 토벌이라고 부르며, 동국의 센고쿠 시대의 개막을 연 사건이라 평가하고 있다.
 
후세 군기물에는 이 이즈 토벌에 즈음하여 소운이 슈젠지에 온천욕을 핑계로 이즈의 정세를 염탐했다고 한다. 또, [이즈 토벌에 앞서 이즈 국 병력의 대부분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고즈케노쿠니|고즈케 국]]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호기였다. 소운의 병력 200명과 외조카 이마가와 우지치카에게 부탁한 병력 300명을 합쳐 500명이 10척의 배를 타고 시미즈 포구를 출발하였다. [[스루가 만]]을 건너 이즈 서부 해안에 상륙하자, 주민들은 해적의 습격으로 오인해 가재도구를 챙겨 산으로 도주했다. 소운의 병력은 일거에 호리고에 어소에 불을 지르고, 아시카가 자차마루는 산속으로 도주 할복했다.]고 적고 있다.
 
그 밖에도 소운은 이즈 국 [[니라야마 산성]]에 새로운 성을 쌓고, 거성으로 삼아 이즈를 통치했다. 그리고, 긴 장대에 글을 써서 우리측에 가담하면 소령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고 약속하는 한편, 참여하지 않으면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옥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또, 병사들의 약탈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였고, 병자들은 간호하는 등 선정을 배풀었다. 이에 자차마루의 악정에 시달려온 이즈의 무사와 영민들은 하나 둘 소운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저항했던 [[세키도 요시노부]]와 그의 [[후카네 성]]을 함락하고 모두 죽여 그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이때까지 과중한 세액을 폐지하고 시코로쿠민<ref>그 해 수확량에서 4할은 영주에게 납입하고 6할은 농민이 가지는 것을 말한다.</ref>의 조세를 정해 영민들은 환영하였고, 이즈 국은 한달에 평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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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오 3년 ([[1494년]]) 간토에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이 다툼이 벌어져 [[조쿄의 난]]이 재연되었다.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사다마사]]는 소운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우에스기 사다마사와 소운은 [[아라카와 강 (도쿄 만)|아라카와 강]]에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의 군과 대치하였지만, 우에스기 사다마사가 낙마하여 죽자 소운은 병력을 철수시킨다.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사가미노쿠니|사가미 국]]의 미우라 가문과 오모리 가문, 이 두 가문이 기둥이었지만, 이 해 불행히도 당주인 우에스기 사다마사, [[미우라 도키타카]], [[오모리 우지요리]] 3명이 죽음을 맞는다.
 
소운은 자차마루의 토벌과 탐색을 대의명분으로 [[가이노쿠니|가이 국]]으로 공격의 방향을 돌려 가이 슈고 [[다케다 노부쓰나]]와 싸우게 된다. 동년 9월 사가미 국 오다와라의 [[오모리 후지요리]]의 [[오다라 성]]을 탈취한다.
 
호조키에 의하면, 소운은 오모리 후지요리에게 계속해서 선물을 보내 환심을 샀다. 처음에 경계하였던 오모리 후지요리도 마음을 열고 소운과 친밀하게 환담을 나누었다. 어느 날, 소운은 [[하코네 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기 위해 귀국에 몰이꾼과 함께 들어가는 것을 부탁했고, 후지요리는 이를 허락하였다. 소운은 강병을 몰이꾼으로 하코네 산에 들여보낸다. 그날 밤 소 천마리의 뿔에 송진을 발라 불을 붙인 소운의 병사와 소가 오다와라 성을 압박했고, 몰이꾼으로 위장해 하코네 산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햇불을 들었다. 수만의 병사가 공격해온다고 착각한 오다와라 성의 병사와 성안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오모리 후지요리는 목숨을 걸고 탈출한다. 이렇게 해서 소운은 쉽게 성을 탈취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이야기로 이와 비슷한 [[오다 노부히데]]의 [[나고야 성 (16세기)|나고야 성]] 탈취, [[아마고 쓰네히사]]의 [[갓산토다 성]] 탈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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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메이오 8년 ([[1498년]]) 소운은 가이 국에서 자차마루를 포박하여 살해하였다. 죽였다는 장소에 관해서는 이즈 국 후카네 성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이마가와 가문의 무장으로도 활약을 계속하여 분키년간 (1501년~1504년)에는 [[미카와노쿠니|미카와 국]]까지 세력을 뻣친다. [류에이히칸]에 따르면, 분키 원년 (1501년) 9월, 이와쓰 성에서 [[마쓰다이라 나가치카]]와 싸워 패배하였고, 미카와 공략은 실패로 끝난다. 마쓰다이라 가문의 선봉으로는 사카이, 혼다, 오쿠보 가문이었다. 단, [[도쿠가와 짓키]]에서는 에이쇼 3년 ([[1506년]]) [[8월 20일]]로 되어 있다.
 
=== 사가미 평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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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 이후 소운은 이마가와 가문의 무장으로서의 활동은 좀처럼 볼 수 없게 되고, 사가미 진출에 집중하게 된다. 에이쇼 3년 (1506년) 사가미 국에 검지를 실시하게 되고 영지 지배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에이쇼 4년 (1505년) 간레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되었고, 동년 우에스기 아키사다의 동생으로 [[에치고노쿠니에치고 국|에치고]] 슈고 [[우에스기 후사요시]]가 슈고다이 [[나가오 다메카게]]([[우에스기 겐신]]의 아버지)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소운은 다메카게와 결탁하여 아키사다를 견제한다.
 
에이쇼 6년 ([[1509년]]) 7월 아키사다는 대군을 이끌고 에치고로 출병한다. 동년 8월 이 틈을 노려 소운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요시의 본거지인 에도 성으로 공격해간다. 고즈케로 출병했던 도모요시는 병력을 돌려 반격하였고, 다음해인 에이쇼 7년 ([[1510년]])까지 소운은 무사시, 사가미에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소운은 [[곤겐 산성]]의 [[우에다 마사모리]]를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으로부터 이반시켜 공세를 펴지만, 동년 7월이 되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이 반격하여 곤겐 산성을 함락한다. [[미우라 요시아쓰]]가 소운측의 요충지인 스미요시를 공략해 오다와라 성까지 압박해온다. 소운은 뼈아픈 패배를 초래하였고,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과 화친하여 위기를 벗어난다. 한편, 동년 6월에는 에치고로 출병하였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는 나가오 다메카게의 역습으로 전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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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쇼 13년 ([[1516년]]) 7월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미우라 가문 구원을 위해 다마나와 성을 공격하지만, 소운은 이것을 격파하고, 미우라 요시아쓰, 요시오키 부자가 농성하고 있는 미사키 성을 공략한다. 격전끝에 미우라 부자는 전사하였고, 사가미는 평정되었다.
 
그 후, 소운은 [[가즈사노쿠니|가즈사 국]]의 [[오유미 구보]]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가즈사 다케다 가문을 지원해 [[보소 반도]]에 이르기까지 전투를 계속하였다.
 
에이쇼 15년 ([[1518년]]) 가독을 적자 우지쓰나에게 양도하고, 다음해인 에이쇼 16년 (1519년) 임종을 맞이하였다. 향년 64세 또는 8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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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에 관한 논쟁 ===
소운의 출신에 관해서는 오랜기간동안 명확히 발혀지지 않아서, 주로 거론되었던 [[야마토노쿠니야마토 국|야마토]] 아리와라 설, [[야마시로노쿠니야마시로 국|야마시로]] 우지 설, [[이세노쿠니이세 국|이세]] 설, [[교토 시|교토]] 설, [[빗추노쿠니|빗추]] 설이 있었다.
 
야마토 아리와라 설과 야마시로 우지 설은 [고호조고다이키]의 이설로써 소개된 것으로 유력시 되진 않았다. 이세 설은 [호조키][소슈 병란기]에 기록되어 있고, 소운이 [[시나노노쿠니시나노 국|시나노]] 슈고 [[오가사와라 사다모토]]에게 보낸 서찰에서 [이세의 세키 가문의 일족이다(伊勢の関氏と同族である)]라고 써인 것을 근거로 [[1901년]] 藤井継平이 주장했고, [[다나카 요시나리]]가 이것을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 [[와타나베 요스케]]는 [간세조슈쇼카후] 등에 있는 막부 마도코로 칙사의 교토 이세 가문 출신으로 이세 사다치카의 동생 이세 사다후지 또는 그의 자식이다 라며 교토 설을 주장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이세 설이 정착되어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세 낭인]이라는 소운의 이미지가 생겼다. 연구자 사이에는 교토 설이 유력시되었다.
 
빗추 설은 [이마가와키] 및 [다이코키]에 적혀있고, [[오카야마 현]] [[이하라 시]] 호센지의 고문서를 조사한 [[후지이 슌]]이 [[1956년]] 소운을 빗추 이세 가문으로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측근이었던 이세신쿠로모리토키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80년]] 전후에 [[오쿠노 다카히로]], [[이마타니 아키라]], [[오와다 데쓰오]]가 사료조사 결과 [이세신쿠로모리토키이세 신쿠로 모리토키]를 후의 호조 소운이 된다는 논문을 발표하고, 그 후, 유력한 반론없이 이에나가 준지등이 연구를 계속하여 대부분 정설로 받아졌다. 에도 시대 초기 출간된 [이마가와키]로 정설이 돌아갔기 때문에 [혼케가에리<ref>간지가 돌아 다시 그 간지로 오는 것=환갑</ref>]이라 불리고 있다. 소운의 출신은 낭인이 아니라, 쇼군을 직접모시는 가문의 명문 출신이다.
 
=== 생년에 관한 논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