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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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뫼즈, 아팅기에, 수아송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와 싸웠다. [[수아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객을 보내 [[로베르 1세]]를 죽였지만, [[플랑드르]]로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해 [[7월]] [[플랑드르]]성에 미리 숨어있던 [[로베르 1세]]의 처남이자 사위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곧 [[부르고뉴의 라울]]이 새로 왕이 되었다. 그의 아내 [[에드지푸]]는 아들 [[루이 4세]]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샤를마뉴의]] 차남 [[피피노 카를로만]]의 손자 [[상리스의 피핀 2세]]의 후손으로, [[샤를마뉴]]의 여섯째 아들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인 샤를 3세에게는 같은 가문의 먼 친척이 되었지만<ref>샤를마뉴 대제-경건왕 루트비히 1세-대머리 카를 2세 르 쇼브-말더듬이왕 루이 2세-샤를 3세 생쁠<br />샤를마뉴 대제-피피노 카를로만-베른하르트(서자)-상리스 백작 피핀 2세(서자)-헤르베르트 1세-헤르베르트 2세</ref>, [[818년]]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 (이탈리아)|베른하르트]]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에 의해 두눈이 뽑히고 장님이 되어 병을 얻어 죽은 일 이후,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사로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로베르의 사위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