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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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arlesIII le simple Jean de Tillet-Recueil des rois de France.jpg|썸네일|왼쪽|110px|단순왕 샤를 3세]]
[[파일:Rollo+Charles.jpg|썸네일|오른쪽|140px|[[롤로]]와 조약을 체결하는 샤를 3세]]
[[911년]]의 [[바이킹]] 그룹이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했다. [[롤로]]가 이끄는 [[바이킹]] 족은 [[파리]]와 [[샤르트르]]를 점령했다. 샤를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지만 대부분 패배했고, [[8월 26일]] [[샤르트르]] 근처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겨우 승리하였다. [[911년]]말 샤를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저 사이네 지역(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노르만족]] [[롤로]]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로마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고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바이킹]]의 프랑스 침공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같은해 [[동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조|카롤링거 왕]]인 [[프랑크의 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 대신 샤를을 왕으로 받들겠다 하여 [[로렌|로타링기아]]도 복속시켰다.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으로 [[롤로]]와 [[바이킹]] 족에게 노략질을 일삼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노르망디에 정착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샤를은 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그의 부하들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롤로는 그리스도교를
그러나 샤를이 [[로렌]] 지역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홀대하자 귀족들은 반발했다. [[918년]]부터 그의 지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안 [[독일]]의 [[하인리히 1세]] 등은 [[서프랑크]]의 변경을 침략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했다. [[919년]] [[8월]] [[잉글랜드]]에 결혼 동맹을 제의, 그해 [[8월 17일]]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결혼하였다. 한편 [[로트링겐]]의 귀족들을 총애했고, 그 중에서도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 하가노(Hagano)를 중용하였다.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분개했다. 로트링겐 내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귀족들이 나타났다. 조카사위가 되는 비게리히,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인 하가노 등 소수만이 그를 지지했고,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공작의 사후, 로트링겐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소극적 지지로 돌아선 귀족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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