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로버트 오펜하이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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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벤디시 연구소(물리학 연구소)의 [[J.J. 톰슨]] 밑으로 유학을 갔다. 이 때는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나, 화학을 배운 그가 갑자기 실험물리학에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오펜하이머는 결국 포기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 밑으로 옮겨 가서 이론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화학에의 응용분야인 스펙트럼의 양자론을 공부한다. 여기에는 [[닐스 보어]]의 결정적인 조언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6년서부터 1929년까지 괴팅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당시 괴팅겐에 함께 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유진 위그너]]와 [[엔리코 페르미]] 등 20세기 물리학을 걸머지고 나가게 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연속 스펙트럼의 양자론 이라는 학위 논문 외에 16편의 논문을 이 기간 동안에 쓰고 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와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교사로서의 그의 자질은 급속하게 향상되어 갔다. 교육적 배려가 풍부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영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듣기를 원해서 세 번 이상 그의 과목을 들으려는 학생들을 퇴짜놓는 일에 골머리가 아팠다고 회상하고 있다. 한 대학원 학생이 던진 질문 하나에 대해서 한밤중까지 계속 답변을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자리를
오펜하이머가 실제로 몇 나라 말을 읽고 쓰는지는
버클리에서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어니스트 로렌스]]를 사귄 것은 오펜하이머의 그 후의 인생을 결정했다. [[맨해튼 계획]]에의 참여도 로렌스의 추천에서 시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이론 물리학과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은 버클리를 세계적인 물리학의 연구 센터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들은 그들의 성격이나 사고 방식이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절친한 사이였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장거리 승마도 함께 하며 오펜하이머의 뉴멕시코의 별장에서 함께 휴가를 즐기기도 했다. "옷피(오펜하이머의 애칭)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옷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학생들의 말버릇이었다. 카리스마를 갖는 그의 지도력은 이미 버클리 캠퍼스에서 1930년 중반에 길러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충분히 발휘된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에의 관심은 1930년대의 중반서부터 고조되어 갔다. 그 전까지는 가르치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정치가 진, 선, 미 중에서
1943년 3월에서 1945년 10월까지의 2년 7개월 동안 원자폭탄을 설계ㆍ제작한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그의 천재성 없이는 원자폭탄의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극찬에서부터 그가 한 일은 실제로 별 것이 아니었다는 비하론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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