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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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활동: 안중근 의사가 직접 적은 안응칠역사 기록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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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활동 ====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이때안중근 초빙된자신은 훈장이《안응칠역사》에서 후조"내 고석로라는나이 주장이예닐곱 있다.<ref>정우택, <安重根조부모의 의사의사랑을 師承關係와받으며 華西學脈의서당에 淵源들어가 연구>8, 《화서학논총》6,9년 화서학회,동안 2014한문을 익혔으며, 354쪽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ref>안중근,《안응칠역사》(1910)</ref>
 
=== 소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