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바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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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제2대 황제 [[후마윤]]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파슈툰인]](Pashtūn;아프간인)장군 세르 샤에게 북인도의 제위를 빼앗기고 유랑하던 시절에 서인도의 신드지방에서 태어났다. 이후 [[사파비 왕조]]의 지원을 얻어 [[1555년]] 인도를 재정복했던 후마윤이 즉위한 다음 해 사고로 죽자 13살의 어린나이의 악바르가 즉위했다. 즉위초기엔 세르 샤가 창건한 스르 왕조등의 무굴 제국에 적대하는 세력이 [[델리]] 주변에 남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나, 부친이 남겼던 중신 [[바이람 한]]이 버텨주어 악바르는 같은해 11월 5일 델리근교에서 힌두교도의 군대를 격파하고, 후마윤이 재건한 왕조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악바르는 성인이 되자, 바이람 한 및 자신의 유모(乳母)일족을 타도하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한뒤, 페르시아인등 출신이 관계없이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재을 등용하여 권력과 군사력을 강화해 자신의 무굴 제국의 세력확대에 나섰다. 앙베르 왕의 딸과 결혼하여 앙베르 왕국과 동맹한것을 앙베르을앙베르를 시작으로 [[라지푸트]]의 왕후을 차례로 연합하고 평정하여 휘하에 넣어 중앙아시아 전통의 부족제로 지탱하던 군대에 토착 힌두교도을 합쳐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이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30대 시절에 인도 북부의 대부분을 병합하는 대판도를 실현시켰다.
 
이런 광대한 판도에 다수의 비이슬람교도을 껴앉게된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제도확립에 나서서, 이슬람법상 이교도에 대해 부과하던 [[지즈야]](인두세)을 폐지하는등 세제(稅制)을 개혁하고, 군인 및 관료에게 평상시 군비(軍備)을 준비할 수 있도록 의무을 부여하여 병마(兵馬)의 숫자에 맞는 단계(만사브)을 내려 관료기구을 서열화하는 것과 더불어 안정된 군사력을 확보하는 만사브다리 제도를 도입했다. [[1579년]]부터 이러한 일련의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대규모 반란으로 진행되자, 수년동안 이를 진압하여 무굴 제국의 지배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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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말기에는 [[데칸]]지방에 진출해 [[아흐마드나갈 왕조]]와 전투를 벌여 판도를 남쪽으로 크게 넓혔으나, 아들 셀림과는 사이가 나빠 악바르는 후계자문제에 대해선 실의에 빠진 말년을 보냈다. [[1605년]] 악바르는 아그라에서 죽고, 셀림은 제4대 황제 [[자한기르 (무굴 제국)|자한기르]]로써 즉위했다. 악바르의 유해는 아그라 근교의 시칸드라에 운반되어 화장되고 이땅에 [[악바르묘]]가 건설되었다.
 
== 각주 ==
<references/>
 
== 바깥 고리 ==
{{위키공용분류|Akbar}}
 
* [http://navercast.naver.com/peoplehistory/foreign/2200 네이버 캐스트 - 악바르 대제]
 
== 각주 ==
<references/>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