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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보(壬戌譜)》의 중시조사적(中始祖事蹟)에 따르면 유구국(琉球國)의 20만 대군이 [[신라]]에 침입했을 때, 단독으로 적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물리쳤다고 한다. 이 공으로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다고 하는데 강양은 합천(陜川)의 옛 이름이다. 그러나 신라 말에 유구국의 침입한 사실이 없으므로, 이는 후대에 날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려가 건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태조의 부름을 거역하여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합천호장(陜川戶長)을 지냈다.
 
《문충공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는 그가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문인으로 유학(유학)의 진흥에 힘써 그 공으로 강양군에 봉해졌으며 박경엽(朴敬燁)의 난을 토평하고, 다시 문학(文學)을 진흥시켜 중국에 버금가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촌장인 [[알평]](謁平)의 후손이라고 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1461 네이버 지식백과 - 합천 이씨]</ref>
 
이개가 합천호장을 지냈고 그곳에서 죽은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합천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