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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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3 sons of Louis the German.jpg|thumb|200px|루트비히 2세와 그의 세 아들]]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 바로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가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로타르 1세]]가 죽자 카를 2세는 형의 영토였던 로트링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막았다.<ref>이국헌, 《교회사 콘서트》 (한국학술정보, 2013) 169페이지</ref> 그러나 대머리 카를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죽은 뒤에 다시 로트링겐을 넘보게 된다. [[로타르 2세]]에게는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조카 로타르가 죽은 뒤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 (로트링겐의 왕자)|위그]]가 나타나자나타났고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과 함께 위그를 사생아로 정하고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한 뒤 [[로트링겐]]에서 추방했다.
 
[[861년]]과 [[863년]], [[864년]] 아들 [[카를로만 3세]]는 아버지에 독일왕 루트비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곧 다른 아들들인 [[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소 루트비히]]와 [[카를 3세|뚱보 카를]]도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독일왕 루트비히는 863년 아들의 반란을 두려워 [[케른텐]]의 그의 영지를 침공했다. 루트비히는 비밀리에 [[카를로만]]의 측근인 군다카르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 군다카르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루트비히에게 갔고 카를로만은 군다카르를 해임하고 케른텐을 직접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