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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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Former Kanggyeong Labor Union Office.png|섬네일|1920년대 지어진 [[강경노동조합]] 사무소.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323호]]
 
강경은 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도]] '''은진현(恩津縣)'''이었다. 강경은 [[금강 (강)|금강]]의 지류가 합류하여 [[서해]]로 연결되는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평야 지대로서 [[백제]] 시대부터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 수상 교통을 바탕으로 [[충청남도]] [[공주시|공주]], [[부여군|부여]]와 [[장항읍|장항]], [[군산시|군산]]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 중기 무렵에도 제주에서 미역, 고구마, 좁쌀을 실은 배들이 드나 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도 비단, 소금 등을 싣고 무역로를 텄다. 한국의 3대 강인 금강이 흐르고, [[충청도]]와 전라북도를 연결하는 중부 지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강경포에는 [[시장 (경제)|시장]]이 크게 발달했다.
 
17세기 말엽에 열린 강경천 주변의 하시장이 개설되었고, 19세기 말에 들어와서 대시장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1870년에 옥녀봉 동쪽 기슭에 상시장이 설시되면서 2대포구, 3대시장으로 발전하였다. 강경포에 형성된 시장은 [[대구광역시|대구]], [[평양]]의 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리며 '1평양, 2강경, 3대구'라는 표현을 만들어냈다. 강경포구는 전국 3대 시장으로서 조선시대부터 4일과 9일장이 열렸다. 채운면의 제방 밑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무지개 모양 돌다리인 [[미내다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