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의암사적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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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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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진주의암사적비<br />(晉州義巖事蹟碑)
| 그림 = Replace this image male-ko.svg | 그림크기 = 150
| 그림설명 =
| 국가 = {{국기그림|대한민국}} [[경상남도]]
| 유형 =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301호 ~ 제400호)#제301호 ~ 제400호|유형문화재]]
| 번호 = 353
| 지정 = [[2000년]] [[1월 31일]]
| 해지 =
|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 =
| 참고 =
| 면적 =
| 수량 = 1基
| 전승지 =
| 전승자 =
| 지도 = 대한민국
| 띄움 =
| 꼬리표 = 진주 의암사적비
| 너비 =
| 대체지도 =
| 설명 =
| 위도도 = 35 |위도분 = 11 |위도초 = 22.2 |남북 = N
| 경도도 = 128 |경도분 = 4 |경도초 = 51.3 |동서 = E
| 웹사이트 =
| 문화재청 = 21,03530000,38
}}
 
'''진주 의암사적비'''(晉州 義巖事蹟碑)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적비이다. [[2000년]] [[1월 31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었다.
 
== 개요 ==
의암사적비는 [[조선 선조|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조선 경종|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조선 영조|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케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 주석 ==
<references/>
 
== 참고 자료 ==
* {{문화재청 문화재|21,03530000,38|진주의암사적비}}
 
[[분류: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분류:진주시의 문화재|의암사적비]]
[[분류:석비]]
[[분류:임진왜란]]
[[분류:1722년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