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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9년(현종 10)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자 아든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찾아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무성의하고 '''[[윤선거]]'''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적어 보냈고, '''[[윤증]]'''은 고쳐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지간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비방하며 적대시하게 된 원인은 비단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뿐만이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되었던 '''[[윤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고, 그의 아버지 윤선거는 어쨋거나 송시열의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것에 끝내 앙심을 먹고, 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송시열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할 때 고향으로 도피했다. 친구는 자살해야 하지만, 자신은 임금의 굴욕을 보고 낙향해도 되는게 송시열의 곧음의 철학이다. 윤증이 그렇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써줄 것을 부탁하자, 송시열은 박세채가 쓴 행장(行狀)을 그대로 빼낀 뒤, 맨 마지막에 박세채가 잘 썼으므로 자신은 쓸 말이 없다고 단 한 구절 집어 넣었다. 이에 윤증이 새로 써 줄 것을 부탁했으나, 끝내 송시열은 거절했다. 송시열의 집요한 증오는 친구를 보내는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했다.
윤증이 가장 가슴 아파 했던 강화도 사건은 이렇다. 병자호란 때 윤선거와 친구들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욕을 보느니 자살을 하자 해서, 윤선거의 부인은 자살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죽지 않고, 섬을 나와서, 남한 산성에 있던 자신의 아버지 윤황을 찾아나섰다. 그 와중에 버려진 어린 윤증은 집의 하인이 업고 그 먼길을 걸어서 논산의 집까지 갔다. 이때 송시열은 남한산성에 있으면서도 인조가 항복할 때 고향으로 가 버렸다. 송시열 뿐만 아니라, 주전파의 거두였던 김상헌도 고향 안동으로 도피했다. 당시의 청렴한강상윤리 대의명분을 드높이 외치던 유자들의 모습이 대략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