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61.82.173.226, 61.82.160.32 편집 되돌림
1번째 줄:
'''양의'''(楊儀, ? ~ [[235년]])는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 [[촉한]]의 관료로, 자는 위공(威公)이며, 양양 사람이다. '''촉한 최대의 역적'''이다.
 
== 행적 ==
건안 연간, 형주자사 부군(傅群)의 주부가 되었는데, 부군을 등지고 양양태수 [[관우]]에게 갔다. 관우에 의해 공조가 되었고, [[유비]]에게 인사하였다. 유비가 초빙하여 좌장군병조연으로 삼았고,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 상서가 되었다. 유비가 오를 정벌할 때, 상서령 [[유파]]와 화합하지 못하여 촉한이 지배하지도 못하는 위나라 영지의 먼 땅인 홍농 태수로 좌천되었다. 즉, '''태수 아닌 태수'''라는 빈 껍데기 직함을 얻은 것이다. 유비 사후, 건흥 3년(225년), 승상 [[제갈량]]이 참군으로 삼았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갔으며, 건흥 8년(230년), 승진하여 장사가 되었고, 수군장군을 더했다. 제갈량이 여러 차례 출병할 때, 계획을 짜서 부대를 편성하고, 양곡을 계산했으며, 군용 물자를 조달했다. 그러나 [[위연]]과 사이가 나빴는데, 제갈량은 서로위연과 다른양의 이유로양쪽의 재간을 사람을 아꼈는데 위연은 재간이 뛰어나서 아낀 반면 양의는 개인 친분 때문에 아꼈다. 그래서아꼈기에 차마 어느 한쪽을 내치지 못했지만 제갈량은 늘 양의의 편을 들었다못했다.
 
제갈량 사후, [[강유]], [[비의]]와 함께 군사를 물렸다. 이때 사마선왕 곧 [[사마의]]가 추격하였는데<ref>《삼국지》〈제갈량전〉</ref>, 강유가 양의로 하여금 기를 되돌리고 북을 쳐 사마의 쪽으로 향하려 하여, 사마의가 더 쫓지 못하고 물러섰다고 한다. 위연은 양의의 지휘를 받기를 거부하고 잔도를 끊어 양의 등이 퇴각하는 것을 방해하여, 마침내 위연과 양의는 서로 표를 올려 상대방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주장하고 싸웠다. 양의는 위연의 병사들을 매수하였고 위연의 병사들이 위연에게 잘못이 있다 하였으므로 위연의 군대는 무너지고, 위연은 사로잡혀 목이 잘렸으며 위연의 삼족도 주멸되었다.
 
위연을 주살한 후, 양의는 성도로 돌아와 중군사가 되었으나 일이 없으므로 한가하게 지냈다. 양의는 퇴각에 성공했고 위연을 주살하였으므로 자신의 공이 크다고 여겨 마땅히 제갈량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어야이어야 한다고 여겼으나, 제갈량은 양의의 성격이 좁으므로 [[장완]]을 후계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장완은 아직 대장군에 임명되지는 않았고(양의가 쫓겨난 후에야 임명), 다만 상서령·익주자사가 되었는데, 양의는 자기 혼자서만 장완보다 나이나 경력이나 재능이나 모두 월등하다고 여겼으며 항상 장완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으므로여겼으므로 원망하여 탄식하는 소리를 일삼았다. 양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장완, 비의, 동윤이 뛰어난 인재인 반면 양의는 무능하고 인격에 결함이 많은 버러지같은 자라 여기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양의의 말에 절제가 없음을 두려워했고 감히 양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다만 비의가 양의를 위로하였는데, 양의는 비의에게 원망을 토로하였고 또 말했다.
 
{{인용문2|'''예전 승상이 죽었을 적에 내가 만약 군을 들어 위씨에게 갔다면 지금 내 처지가 이토록 영락했겠소!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되돌릴 수 없습니다.'''}}
 
비의는 은밀히 이 말을 상주했다. 건흥 13년(235년) 정월, 양의는 파직되어 서민이 되었고, [[한가군]]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유배지에서도 양의는 이러한비방하는 조치에말을 불만을 품고 주변 사람들을 선동해서 모반을 일으키다가 적발되어하여, 마침내 군에 하명하여 양의를 사로잡도록 했다. 양의는 성도로 압송되었는데 압송되는 함거 안에서 자결했다.
 
== 평가 ==